그 해 겨울을 지나면서 이경은 수이가 자신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수이는 자동차를 포함한 기계에 매력을 느꼈고, 정리정돈과 청소를 열심히 했으며 외모를 가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는 어떤 관심도 없었다. 반면 이경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일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이경은 서서히 깨닫게 됐다. 수이가 자신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수이의 그런 성향 때문이라고. 수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경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수이의 방식이었다. 수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 수행할 뿐이었다. 반면 이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고 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
두 눈을 감고, 아프다고 생각하는 부위를 바라보세요. 통증이 보이나요? 주기적으로 통증이 밀려왔다가 사라지나요, 아니면 그 상태 그대로 거기 존재하나요? 이제 그 통증이 공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공도 종류가 가지가지죠. 탁구공, 야구공, 축구공, 어쩌면 럭비공이나 애드벌룬 같은 것도 있겠습니다. 농구공부터 시작해봅시다. 그게 농구공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꿈과 현실의 어중간한 경계를 드나들던 그의 머릿속으로 안경을 낀 코끼리가 나와서 그를 향해 말했다.
"이제 그 공이 야구공만큼 줄어들다가 다시 탁구공처럼 작아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자, 천천히 호흡을 내쉬면서, 이번에는 그 공이 점점 커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다시 농구공으로, 그 공을 하늘로 던져보세요. 한 3미터 정도. 던졌다가 받아보세요. 거기 그분!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나를 바라보나요? 제가 뭐, 이상합니까?"
코끼리가 손끝으로 안경을 조금 올리며 그를 가리켰다.
"내가 이걸 던지면, 과연 선생님이 이 공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말입니다."
"한번 던져보세요. 웬만한 건 제가 다 받을 수 있으니까."
코끼리가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 코끼리에게 뭔가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다가 팔을 내려놓았다.
"아니, 왜요?"
코끼리가 물었다.
"이걸 선생님이 어떻게 받겠어요. 제 건 지구만 한데."
(!!씬 전환!) 행복은 자주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만 존재한다. 우리가 그걸 공처럼 가지고 노는 일은, 그러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 만약 실제로 그가 코끼리에게 갑자기 그 공을 던졌다면, 코끼리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곤충들은 그렇게 죽지 않겠지만, 적어도 말할 줄 아는 코끼리라면 그렇겠지.
능동적이고 살아 있는 인간은 '채워짐에 따라 커지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 (블래크니 233페이지)
나는 지금부터 임의의 벽입니다. 아가리를 벌린 늑대였다가, 무섭게 낙하하는 솔개였다가
흥미롭게 이야기의 속도로
차오르는 어둠의 힘으로
당신을 향합니다.
나는 순식간에 적을 만듭니다. 지금 당신은 사냥개입니까, 사냥감입니까.
나의 표적입니까,
미끼입니까.
흔들리는 촛불과 함께 나는,
드디어 이빨을 드러냅니다. 진기한 사건 속을 질주합니다. 감정의 파도 위를 활강합니다. 전세계처럼 확대되었다가 쉼표처럼 줄어들었다가
당신을 발견합니다. 나는 단숨에 기승전결을 잃어버립니다. 당신이 점점 유일해집니다. 드디어 토끼의 긴 귀가 솔개의 부리가 되는 순간, 늑대의 아가리에서 검은 피가 튀는
바로 그 순간,
스위치를 올려라!
우리는 멍하니 바라봅니다.
늑대들이 무심한 왼손,
오른손으로 변하는 것을.
스르르 허공이 되는 새들을.
당신과 내가 맹렬히 질주하던 세계에서
우리는 문득
환해진 채로
-스위치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사라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기념일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날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소규모 인생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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