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

그울 2017. 1. 22. 23:31







감독은 천재인걸까? 엠마를 처음 보고 빠져든 아델처럼 나 또한 그녀의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아델보다 내가 엠마를 찾기위해 더욱 혈안이 된다. 그리고 감독은 아주 긴 시퀀스로 나를 가지고 논다! 그러다 지쳐갈 쯔음 이제는 나와야지 싶고, 그러면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본다. 지금까지 본 모든 로맨스 영화를 떠올리며 '썸머처럼 프레임 인 해서 엘리베이터를 탈까? 샘이 우연히 걷어젖힌 커튼 뒤의 수지처럼 짜잔 등장할까? 아니면 장국영처럼 콜라 한 병 쥐고 뚜벅뚜벅 나타날까?' 그러나 모든 예상을 깨고 그녀는 파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마치 지금까지의 설레임은 애들 장난이었다! 하듯 역대급 설렘을 안겨준다. 사진을 첨부할랬으나 하지 않겠다. 이 기분은 직접 접해봐야만 압니다.

주인공의 등장 방식을 이야기하니 ㅡ주인공이라 하기엔 애매한 게, 완전히 아델 시점의 영화..이긴 하지만ㅡ '바즈 루어만 식 개츠비를 만나기 위한 여정'도 떠오르는데 개인적으론 이게 더 긴장감있고 흥미진진한 씬이었다. 내 생애 이런 건 처음이야 1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역시 다정하고 귀엽다. 아델의 불안한 눈동자는 자주 움직이고, 엠마의 반쯤 감긴 눈은 한 번 촛점을 맞추면 그 대상으로부터 잘 움직이질 않고 박혀있는데, 이 두가지가 슥 마주칠 때 생기는 분위기가 꽤 따뜻했다. 










찍으면서 아델 머리카락에 붙은 벌레에게 참 고마웠을 것 같다. 그걸 엄지와 검지로 떼내는 손도 좋았고 그 상황에 흐르는 엠마 대사가 사르트르인데다 뒤의 배경은 푸른 나뭇잎이 넘실넘실. 아름다운 장면. 요즘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인간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 존재란 각각 무엇이고, 어떤 근거일지 ㅡ왜냐하면 요 향연의 대화에서는 어떤 주장을 하든 꼭 근거를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예외가 아니며, 플라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를 어겼거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주장을 했을 경우 책으로 옮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근거 없는 주장을 이 책에선 찾을 수가 없다. 궁금해졌는데 마침 이 장면을 보니 사르트르의 책도 읽어보고 싶다.     







양질의 샷은 바로 이런 거 

시퀀스만 긴 게 아니라 샷도 겁나 길다. 씬은 평범한 편이고. 시퀀스가 길고 많아서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러닝타임이 무려 세시간. 모르고 틀었는데 영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물이 마시고 싶은데 움직이긴 싫고 영화는 재밌고 끊으면 절대 안 되겠고 그래서 그냥 봤다가 끝나고 넉다운 됐다. 다음엔 최상의 컨디션으로 후반부에 더 집중해야지. 





각본보다도 단연 연출이었습니다. 





미술관도 참 좋았다. 더 길게 해주지. ㅡ이제와서 하는 소리다ㅡ 

조각들이 가진 상아색 양감과 질감과 고운 선 

그 뒤로 흐르는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 

그것들 사이로 오가는 두 가지 눈동자. 흔들리는 눈과 굳센 눈. 





그들이 관람한 작품처럼 그들도 한 폭의 회화가 되고

프랑스식 위트는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이런 퀴어 영화는 처음이었다. 친구는 야하다고 했지만, 내겐 전혀 야하지 않았고, 예뻤다. 퀴어 예술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앞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다정한 작품의 선례로 두고두고 꼽을 만하다. 

내가 영화를 볼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은 비약이다.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펼쳐지는 전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 영화가 아델의 이야기를 세 시간동안 한 것은 이 비약을 없애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에 빠져든 우리는 도리어 영화가 막을 내리면 엉덩이가 배기더라도 마음만은 아쉽다. 그래서 그 아쉬운 ㅡ아쉬워할 것이 분명한ㅡ 마음을 달래듯 후반부는 아델의 이별 후 슬픔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영화는 너무나 아델의 시점이라 후반부에서 엠마는 한참이나 등장하지 않고, 그래서 아델만큼 우리도 엠마가 보고싶어지고, 그립고, 쓸쓸하고, 그렇다. 


아델의 시점에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독특했던 장면으로는 

아델이 격정의 시기를 보내며 샐러드면 됐다고 기지개를 펼 때 순간 앵글을 거꾸로 잡고 완전히 하이 앵글 (?) 로 찍는데 이 부분이랑 

베드씬 풀샷이랑 

맨 마지막 장면

은 관조하는 느낌이 나서 특이했다. 아 엠마가 아델이 차에서 내리는 것 볼 때도 엠마 시점이었는데 이건 영화로 옮기기 위해서 넣어야만 하는 복선이니까.. 어쩔 수 없고. 


상을 한 다섯개쯤 휩쓸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잘 만들었다. ㅠㅠ 보면서 박수와 감탄사 마구마구. 원랜 medianeras 다운되는거 기다리면서 잠깐 보다 끌랬는데 이게 뭐야 반나절이 가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