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

나는 정희진님을 보며 평안을 얻고 수행을 한다.

그울 2018. 5. 13.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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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생은 너무 힘들다. 인생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안겨준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수단으로 세 가지가 있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는 강력한 편향, 고통을 줄여주는 대리 만족, 고통에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 인간은 원래 행복해질 수 없는 종자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본 고통의 근원은 유한한 육체, 외부세계, 타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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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도취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 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겟이다. (...) 혐오 발화는 자기를 바라볼 필요도 용기도 없는 이들의 테러다. 자신을 모르는 이에게 가장 좋은 치유는 면벽이다. 면벽? 깨달을 때까지 격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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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삶이 몸에 체현된 과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미래가 궁금해서 점쟁이를 찾아갈 피룡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점술가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몸을 보고 과거를 말해준다. 찾아간 사람도 과거나 현재의 마음 상태를 짚어줄 때 용하다고 평가한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므로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는 오지 않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스티브 잡스, 피터 드러커, 엘빈 토플러 등 혁신가들의 말대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방법은 직접 실현하는 일뿐이다.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김괜저를 생각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인생을 서사로 풀어낸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매일 즉시 쌓아가는 생생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 생생함에 감탄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현재를 일단 살고나서 과거를 되돌아볼 일이 있으면 그 때 비로소 꾸역꾸역 서사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퇴보된, 색이 바랜, 종잇장같은 서사인 것이다. 나는 imf키즈의 생애를 읽으며 느낀 '약간 눅눅한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이제 알 것 같다. 그것은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하나의 인생으로 만들려는 '억지'의 느낌이었다. 모든 인간의 서사는 살아있는 생선이 아니라 죽은 생선을 튀겨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생선을 마치 살아있는 것마냥 오묘한 식감으로다가. 나는 이 튀김에 현혹되어 나의 삶을 서사로 살려 했으나 현재의 서사성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너무 힘들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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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 (화, 틱 낫 한)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제),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은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수도 없고 누구로부터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따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도 줄어든다.  (soul verse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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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생에 개입할 수 없다. 삶은 어쩔 수 없음이요, 외롭고 지겨운 노동이며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 이후엔, 바로 노병사다. 인생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소설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을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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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임지현은 <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라는 글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가 한 말을 전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 생각, 사랑(관계), 자기변화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승부나 성공 패러다임과 달리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어서 아무도 속일 수 없다.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에 몇 안되는 정의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는 자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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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구는 절망적이다. 하지만 똑같은 절망은 없으며 절망을 대면하는 시선 역시 동일하지 않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정희진처럼 읽기 

그녀도 한국에서 살고 나도 한국에서 산다. 살아있는 사람의 글을 보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