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그울 2019. 4. 13. 22:54

99.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집에서 자라고 했는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다시 이러면 진짜 혼낸다." 다그치다가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볼을 비비대던 엄마,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149. 나는 수업을 들을 때나 학관 로비에서 혼자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 지하철에서 앉을 자리가 날 때면 노트를 꺼내 공무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쓴 편지들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다. 점심으로는 무얼 먹었고, 저녁에는 무얼 먹었고,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을 봤고, 어떤 공부를 했고, 학원에서는 시험지를 몇 장 채점했고 하는 아무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공무가 웃을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메모해놓았다가 편지에 썼다. 너 그거 정말이야? 웃겼어, 라는 답장이 오면 그보다 큰 보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긴 글을 수시로 썼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편지들이 그 시절의 나를 구해줬던 것 같다. 데이트도 없고, 변변한 학교 친구도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예쁜 샌들 하나 사지 못하고, 자주 체하고, 과외는 잘리고, 일하는 학원의 동료들과는 겉돌면서도 괜찮았다. 세상 누군가는 나의 이런 변변찮은 일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3학년 봄이 갔다.

 

162. 내가 매일 조금씩 달라졌듯이, 모래 또한 내가 처음 만났던 모래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4. "그래요, 선생님. 전 돈이 좋아요. 돈이 좋아서 여기 왔어요." 

"내 방에서 나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왔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으면서도 결국 기대하게 된 나를 탓했다.

 

166.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는 모래를 나는 안았다. 모래의 몸은 감기 걸린 사람처럼 뜨거웠다. 얇은 니트 아래로 어깨와 등의 가느다란 뼈가 만져졌다. 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충분히 벗어날 있는 상황에 다시 들어가놓고 나와 공무 앞에서 외롭다고 징징대다니. 모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 

 

179.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

 

229. 숙모,

여자는 고개를 들어 혜인을 바라봤다.

숙모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게 될 줄은 몰랐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엷게 웃었는데, 혜인은 그 말이 여자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 넌 내가 불쌍해 보이냐,

여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어때 보이는데.

짧은 반고수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작은 눈, 볼 위의 주근깨, 입가의 파인 흉터, 기다란 목, 큰 손과 발, 말린 생강 냄새, 따뜻한 체온, 두꺼운 양말, 혜인을 바라볼 때의 장난스러운 표정 같은 것들.

숙모는 숙모지.

혜인은 그렇게 말하고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내 숙모지. 

여자의 곁에 붙어 앉은 혜인의 머리를 여자는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너는 혜인이지, 혜인이 너는 너지.

 

243. 대도시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누나는 언제까지 엄마에게 얹혀살 거냐고 타박했지만, 내 삶까지 신경쓰기에는 누나는 너무 바빴다.

 

251. 말수가 적은 중년 커플과의 저녁 시간마저도 기다리게 되는 정도의 외로움에 빠져 있노라면 한 달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므로. 내게는 시간을 흘려보낼 구멍 같은 것이 필요했다. 

 

268. 엉뚱하고 철딱서니 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모두를 웃게 하는 막내 랄도. 그런 역을 맡으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이. 나는 모두를 실망시켰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누군가가 내 배를 걷어찬 것처럼 아팠다.

 

274.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