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그울 2014. 7. 27. 01:00

 

 

 

 19.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마르크스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열여섯 살 때 여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잠시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그녀는 학교 배구팀 주장이었고, 아주 아름다웠으며,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녀는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내가 사준 오렌지 스쿼시를 앞에 놓고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남자가 9시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진짜로 9시에 전화를 하면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겠어?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9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거든."

나는 그 나이에도 그 애의 마르크스주의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 애의 말이나 행동에 관심이 없는 척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몇 주 뒤에 처음으로 그 애와 키스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가 의문의 여지 없이 아름다웠음에도 -그리고 배구만큼이나 사랑의 기술에도 능숙했음에도- 우리의 관계를 지속되지 않았다. 늘 약속 시간보다 늦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것에 내가 먼저 지쳤기 때문이다.

 

 

 

 

 

 

 21.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냉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16.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1.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야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6. 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클로이가 며칠 뒤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오히려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양말을 널다가 기습을 당했다. 나는 침실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내 목소리에는 긴장과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만일 종이에 쓰는 글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글쓰기가 유혹이 된다.

 

 

 

 

 

 

3.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8.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정제 등 온갖 약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9. 이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사람이 미망-사랑, 자신이 달걀이라는 믿음- 에 빠져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완해주는 것 -비슷한 미망에 빠져 있는 클로이와 같은 연인, 토스트 한 조각- 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될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7. 편지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기억만 새롭게 할 뿐, 편지에서 그녀의 말의 억양과 악센트를 느낄 수 있었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얼굴 모습, 그녀의 살갗 냄새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나는 그 편지의 최종성 때문에, 확인되고 분석되고 과거 시제로 바뀌어버린 상황 때문에 울었다. 그녀의 구문에서 묻어나는 의심과 양면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메시지는 분명했다. 끝났다. 그녀는 끝난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사랑은 썰물이 되었다. 나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한 관계가 나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파산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느끼는 배신감이었다. 클로이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주장했다. 새벽 4시 30분에 내 마음의 법정에서 그런 공허한 평결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가망 없는 짓인지를 잘 알면서도, 아무런 계약이 없었음에도, 마음의 계약밖에 없었음에도, 나는 클로이의 신의 없는 짓에, 그녀의 이단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낸 것에 상처를 입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능한가?

 

 

 

 

 

4. 클로이의 눈물이 시작된 직후 기장이 착륙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 눈물 때문에 승객들 모두가, 비행기 전체가 물에 잠겨버렸을지도 모른다. 꼭 대홍수가 일어난 느낌이었다. 멀어지고 있는 일의 필연성과 잔인함 때문에 양쪽에서 슬픔의 큰 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의 관계는 잘 안풀리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반드시 끝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적 환경 속에서, 객실의 기술문명적 환경 속에서, 비행기 승무원들의 임상적 관심 속에서, 낯선 사람들이 감정적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며 점잖은 체 고개를 돌리면서도 내심 안도감에 빠져 있는 다른 승객들 사이에서, 나는 더 큰 외로움을 느꼈고, 더 큰 초라함을 느꼈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도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클로이가 그냥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9.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엇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10.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5.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6.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 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연인이 외적 자산을 벗어버린 나를 좋아하고,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평가해주고,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풀이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의 이마에 점이 생긴다든가, 나이 때문에 몸이 시든다든가, 불황 때문에 파산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의 표면에 불과한 것에 손상을 주는 사고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해주어야 한다. 설사 우리가 아름답고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것을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니?

 

 

 

 

 

 

 

 

8.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뭐가 나타날지 두려워 나는 감히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생각의 자유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악마들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겁에 질린 정신은 방황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편집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상태였다. 버클리 주교는, 그리고 훨씬 뒤에 태어난 클로이는 눈을 감으면 바깥 세계는 꿈이나 다름없이 비현실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착각의 힘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는 충동, 생각만 하지 않으면 불쾌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낭만적 테러리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훨씬 덜 즐거운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생략~ 1.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표와 다이어리의 엄격한 요구에 이끌려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2. 클로이가 떠나는 것과 더불어 현재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욕망도 사라졌다. 나는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살았다. 그 말은 내 삶을 그녀와 함께했던 삶과 관련지어서만 생각했다는 뜻이다. 나는 눈을 감고 살았다. 내 눈은 뒤로, 안으로 기억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 낙타를 따라 기억의 모래언덕들 사이를 구불구불 나아갔다.

 

 

 

 

 

 

 

 

    /알랭 드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