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ure nacre :: 무참한 황정은의 두 권

무참한 황정은의 두 권

2016. 2. 25. 12:49 from 자개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7.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전철역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재킷과 짧은 치마로 한 벌인 감색 정장을 입었고 비둘기 가슴처럼 빛깔도 감촉도 사랑스러운 스타킹을 신었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걸을 때 정장을 단단하게 차려입은 굵은 골격이 괴상한 방향으로 솟구쳤다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누구의 지문으로도 뭉개버릴 수 없는 앨리시어의 지문을 배양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11.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앨리시어는 이대로 서서 꿈을 꾼다. 여전히 고모리에 남아 고모리를 반복하는 앨리시어의 꿈을 꾼다. 그것은 백 퍼센트 열리시어의 뒤통수로 시작된다. 소년 앨리시어의 뒤통수, 그게 여기 있다. 그의 머리통은 둥글고, 땀과 기름으로 가닥가닥 나뉜 머리털은 먼지가 달라붙어 탁한 빛깔이다. 가늘고 노란 목엔 땀이 돋았고 머리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난감한 목덜미는 대개, 찌르는 듯한 햇빛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

.

그리고 개가 있다. 개는 개장에 있다. 언제까지고 개는 그 속에 산다. 개는 개로 이름이 없다. 하루종일 개장 속에서 움직인다. 검은 발은 언제나 배설물로 젖어 있다. 짖지도 않는다. 앨리시어의 늙은 아버지는 봄에 수컷 개를 빌려와서 개장에 넣는다. 개가 새끼를 배고 낳으면 적당한 크기로 자랄 때까지 인간이 먹고 남긴 것으로 새끼를 먹이다가 여름에나 늦가을에 정성껏 불에 구워 이웃들과 나눠 먹는다. 앨리시어는 개장을 들여다본다. 개가 머리를 낮추고 개장 속을 오간다.

이해엔 새끼를 먹지 않고 남겨두었으므로 개장 속에 개가 네 마리다.

새끼들은 잠들었다.

개야.

 

개야.

개가 발톱으로 개장을 긁는다. 긁어도 소용없는 모서리를 맹렬하게 긁고 뒤로 물러났다가 같은 자리를 다시 맹렬하게 긁는다. 수년째 새끼 잡는 냄새와 기척에 시달려 돌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여덟 개나 되는 젖을 덜렁거리며 개장 속을 돌아다닌다. 머리도 크고 몸도 크고 귀도 넓고 다리도 굵다. 발육이 부진한 사내아이 정도는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개는 인간의 눈치를 살핀다. 엉덩이에 꼬리를 딱 붙이고 새끼들 앞을 오가다 오줌을 싼다.

(…) 개는 밥을 먹으면서도 경계하느라고 올려다본다. 이마에 주름이 져 울상이다. 울상인 그 얼굴에 윤기가 흐른다. 굵은 다리와 잘록한 옆구리와 커다란 혓바닥 같은 두 짝의 검은 귀에도 기름기가 돈다. 겁을 먹고 도사리는 이 짐승의 몸이 묘하게 육감적이라서 앨리시어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털로 덮인 짐승의 몸인데도 인간의 나체와 닮았다. 벌거벗은 것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빨리 죽으면 좋을텐데.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앨리시어는 조그맣게 소망하며 개장 문을 닫고 고리를 건다.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찡그려 개에게 이를 드러내 보인 뒤 개장 앞을 떠난다.

 

 

148.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아버지는 무사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우리 아버지는 무사해. 불빛을 등지고 서서 얼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버지가 무사해서 고미는 기뻐 보인다. 앨리시어도 팔을 흔들어 보인다. 괜찮다. 다음에 아버지가 다시 때리면 내가 때려줄게. 내가 때려서 다시는 때리지 않게 만들어줄게. 이제 앨리시어는 집으로 돌아간다. 멀리 앨리시어의 집이 보인다. 개장도 있고 집도 그대로 있다. 흐릿한 밤 속에 검고 선명한 덩어리로 솟아 있다.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현관은 간단하게 열린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냄새가 난다. 운동화를 벗고 어둠 속을 더듬어 방으로 들어간다. 손가락이 얼얼하고 머리도 얼얼하다. 차갑게 식은 몸으로 바닥에 눕는다. 꿈도 없이 짤막한 잠을 자고 새벽녘 정적 속에서 눈을 뜬다. 높다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것이다. 앨리시어는 부은 손가락들을 가슴에 올리고 눈을 깜박인다.

눈을 뜨기 직전에 무슨 소리인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 하고 눈꺼풀이 벌어지는 소리, 뼛속의 성장판이 끓는 소리, 그 소리와도 같은 소리. 목이 마르다.

앨리시어는 부엌에서 바닥에 남은 자국을 본다.

 

 

161.

.

.

앨리시어는 그의 동생을 야, 라고 부른다. 그대에게 그 이름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

여태 노력했으나 그 이름 여태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이것이다.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이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을 어디까지 들었나.

이것을 기록했나. 마침내 여기까지, 기록했나.

앨리시어가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가 옳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다시 한번 그대가 옳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파씨의 입문, 황정은

 

42. 대니 드비토

일부는 진심이었지만, 총체적으론 농담이었고,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붙어, 하고 유도 씨가 말했다.

얼마든지 붙어.

 

사양하지 않고, 나는 붙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내키는 곳에 내키는 대로, 붙어다녔다. 유도 씨의 정수리와 오른쪽 팔이 가장 좋았다. 유도 씨는 오른손잡이니까, 거기 붙으면 이리저리 흔들렸다가, 늘어질 수 있어 좋았고, 정수리에선 여러가지를 광범위한 각도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어깨와 목이 뻣뻣하다는 이유로 유도 씨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령이라도, 어쩌면 원령이라서, 살아 있는 몸에 부담이 되는 듯했다. 어쩌면, 어쩌면, 어깨 위쪽이란, 심령적인 면에서 특별히 민감한 부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균등하게 나눠 붙었다. 음울한 것은 유도 씨의 발등으로 내려가고, 비교적 밝은 것은 옆구리에 붙고, 원령으로서의 호기심은 정수리와 손등에 머물렀다. 그밖의 잡념은 각자 좋을 곳으로, 유도 씨의 윤곽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원망하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강해질 때는 유도 씨의 발꿈치에 스멀스멀 모였다가 바닥에 달라붙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든 유도 씨에게 붙어다니다가, 더는 붙어다니지 않게 되었다. 거리에 너무나 만은 자극이 흩어져 있었으므로, 내가 나의 점착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이발소 앞에서,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매혹되는 바람에,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를 잊은 상태로 이틀이나 거기 묶여 있다가, 다시 그 길을 걸어 퇴근하는 유도 씨를 발견하고 간신히 달라붙은 적도 있었다. 그뒤로는 집에 머물렀다. 집에서, 유도 씨의 사물 곁에 머물면서, 유도 씨를 기다렸다. 무료함이 깊어지면 건물 벽을 따라 수직으로 천천히 오르내리며 산책을 대신했다.

 

47. 대니 드비토

그는 막 숨이 끊어지려는 참이었다. 플라스틱 물풀과 빨간 금붕어가 담긴 수족관의 불빛이 그의 납작하고 조글조글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그의 가슴이 조금 팔딱거렸고, 이윽고 숨이 멎은 뒤에, 노인의 이마에서 둥근 것이 부풀더니 에라, 하면서 사라졌다.

에라.

그는 어째서 그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을까. 나이를 먹어 죽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는 걸까. 에라, 하고. 어쩌면 그것은 개인적인 경우일 뿐이고, 다른 노인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에라, 가 아니고 애라,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애라,하고 누군가의 이름을,부른 것일지도 몰랐다.

애라.

에라.

나는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걸까. 왜 진작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생강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런 냄새를 풍기게 된 연유 같은 것은 따져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는데, 어쩌면 나처럼 복근이 단련되어서 남아버린 원령의 경우, 결국엔 생강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볼 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유도 씨와 미라 씨는, 복자와 더불어 잘 살아가고 있었다. 유도 씨는 매일 미라 씨의 머리를 만졌다. 미라 씨는 유도 씨의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맡긴 채, , 이 방에선 생강 냄새가 나요, 그렇지 않나요,라고,속삭이고,속삭이는 것이었다.

 

63. 낙하하다

죽는 순간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어서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는 상태로 이런 암흑 속을 떨어져내리고 있지만 결국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죽는 순간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었다면 그것은 좋은 죽음인 걸까. 죽음의 형태로 말하자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내 죽음을 두고 호상 호상 호상이라며 만족스러워했을까.

그런 광경을 생각하면 입맛이 달아난다. 달아나는 입맛이라도 느낄 수 있는 입이 여태 남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으나 빈틈없이 달아난다. 예컨대 이런 기억 덕분이다. 도무지 호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말하는 장례식에 다녀온 적이 있다. 죽음을 맞은 사람은 수년간 손가락도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육인용 병실에서 질식해 죽은 사람이었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그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아서 누린 나이가 팔십팔세나 되었으므로 마땅히 호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죽었으므로 호상이라면 호상의 의미란 결국 죽은 사람의 처지가 아니고 산 사람의 처지에서 정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염을 할 때 보니 그의 입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고독해보였다. 더는 그 정도로 고독할 일이 없으니 결국은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줄기차게 호상을 소망했다. 잘 죽고 싶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불에 타거나 물에 쓸려가거나 무너지는 건축물에 깔리는 일 없이, 조금 더 바란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요즘처럼 사람의 죽음이 험한 세상에서 평생을 좋은 일을 하고 정갈하게 살아도 찾아올까 말까 한 지복을 바라는구나 너는, 하며 웃었다. 그 정도가 지복이라면 요즘의 인생이란 서글픈 것이로구나, 지나가듯 생각했다.

 

175. 디디의 우산

디디는 젓가락으로 밥을 조금 집어서 탁자에 놓았다.

.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드는 어떤 것들.

어떻게 생각해 하고 디디는 조그만 밥 무더기 네 개를 탁자에 늘어놓고 도도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정말 문제일까.

?

이 가운데 어느 문제가 가장 문제라서 돈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뭐랄까 좆 같은 답이 나오는 걸까. 나 오늘 종일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뭐 좆?

.

도도가 눈을 깜박이며 디디를 보았다.

?

, 하며 디디는 무더기들을 보고 있다가 오른쪽부터 차례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178.

10

디디는 새벽에 자기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방이 어둡고 몸이 눌린 것처럼 무거워 여기는 어디냐고 생각했다 도도의 숨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디디의 왼족으로는 벽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도도가 있었다. 도도의 팔뚝에 돋은 발진이 뜨겁고 까슬까슬하게 팔에 닿았다. 그 옆에 멍하게 접촉하고 있다가 디디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문턱을 넘다가 피비의 발을 밟을 뻔했다. 밤새로독 술을 마신 동기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고 있었다. 디디는 그들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화장실에 갔다. 불을 켜고 눈부셔 눈을 감은 채로 변기에 앉았다.

소변을 소량 누고 힘이 빠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들이 전에 배가 끊어질 것처럼 웃었던 기억이 나서 그게 왜 그렇게 웃겼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땐 웃겼고 지금도 좀 웃기지만 결국 웃긴 얘긴가, 신발을, 웃기잖아, 역시 웃기다, 이게 웃기지 않을 사람 있을까, 부시는 뭐 웃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건 어쩐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디는 휴지 두 칸을 끊어 소변을 닦고 손을 닦고 물을 내렸다. 모두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잠자리로 돌아왔다. 빗소리를 들었다. 어머 비가 오네, 생각하며 가물가물 잠들었다가 우산, 하며 눈을 떴다. 이 집에 우산이 몇 개나 있지, 신발장 속에 우산이 몇 개쯤 있지, 생각하고 도로 일어나 앉았다. 거실에서 누군가 잠결에 뭐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디디는 마지막으로 우산을 센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최근엔 가물어서 비가 없었으므로 우산을 볼 일도 없었지.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디디는 도도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좁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달칵, 하고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186. 뼈 도둑

주인분 금방 오신다네요,라는 중개인의 말을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세입하는 사람은 세입놈이고 집주인은 주인분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농담하듯 말하고 웃거나 신랄하게 말한 뒤 당황하는 중개인의 말을 지켜보거나. 장이라면 신랄하게 말했을 것이다. 장은 그런 것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전 집을 계약할 당시에 만난 중개인은 집주인을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장이 잔인한 말을 동원해 그걸 지적하자 그 노인은 허를 찔린 것처럼 웃다가 산 개구리를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씨발 장처럼 말해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남기지 않고 말하는 경우에 관해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196.

설탕과자처럼 어감도 감미로운 성탄, 성탄 밤에 예배중인 교회로 구걸하러 들어온 걸인이 있었어. 한 끼 먹게 해달라고 뒤쪽에서 서성거리다가 전도사들에게 떠밀려 쫓겨났다. 하필 성탄 밤에 하필 그곳을 구걸의 장소로 선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구걸이었지만 어쨌거나 예배는 잠시도 중단되지 않았어. 예배가 끝난 뒤엔 난방 덕분에 뺨이 달아오른 사람들이 선물 꾸러미를 나누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 닥치는 것보다도 나쁘다. 특별히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 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랑받지 못하도록 태어난 당신도 있다는 의미일까, 그런 당신은 누구고 저런 당신은 누굴까.

어느 쪽이든 정말로 사랑해줄 생각도 씨발 없으면서,라고 하면서도 장은 교회 다니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봄이었을 것이다.

일찍 일을 마친 그는 장을 바깥에서 만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형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노인이 잔디 깎는 기계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형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였다. 장은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한 잔씩 마셨고 맞잡은 손을 비비며 집으로 가는 오르막을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비틀거리며 비탈을 내려오던 중년 남자가 그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 남자는 한번 지나갔다가 되돌아와서 장을 불렀다. 아니 이거 장 형제. 형제,라고 불러세우고 그런데 왜 남자와 손을 잡고 가느냐고 물었다. 머리를 기울이고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고 비딱하게 섰다가 앞뒤로 몸을 끄덕이며 대답해보라고 어, 불쾌하게 사내새끼들끼리,라고 말했다. 그냥 가세요 제발 가세요 가시라고요, 그는 말렸고, 뭐가 불쾌하세요 제가 불쾌합니까 저도 당신이 불쾌한데요,라고 장이 말했고, 주먹이 오갔다. 문 닫은 과일가게 차양막이 뜯어졌고 사실 몸을 가눌 여유도 없었던 남자는 장의 주먹질 몇번, 이라기보다는 제풀에 뒤로 넘어져서 머리를 깼다. 장은 가해자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날벼락 같은 밤이었다.

그주엔 교회에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장은 일찌감치 일어나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장이 걱정되어서 동행했다. 예배 중간중간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돌아보는 노인들, 새침한 기색으로 장과 그를 등지고 앉은 피해자의 가족들, 근엄하게 입을 다문 사람들, 보라는 듯 친밀하게 인사해오는 사람들 가운데 장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 모여 점심을 먹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왈그락 덜그럭 쏟아지고 부딪치고 모두가 한 벌씩 나누어받은 뒤 식사가 시작되었다. 어느 쪽에서 들려왔는지는 몰라도 거시기한 관계, 라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다시 왈그락 덜그럭. 장은 입에 든 것을 꼼꼼하게 다 씹은 뒤 장과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부부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에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

장은 그뒤로도 몇주간 더 출석했고 마침내 목사로부터 더는 교회에 오지 말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은 의기양양하게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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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