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다.
-
냉장고를 통해, 비로소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환상적인 승리였다. 따라서 20세기를 냉전의 시대로 보는 시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인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다른 무엇보다 이 환상적인 냉장술이었다. 그렇다.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
쇠로 치자면 녹이 슬 만큼 B와 나는 오랜 친구다. B가 두 살이 더 많지만, 어쩌다보니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일학년 때였다. 오리엔테이션 현장이었는데 교수인지 교직원인지가 올라와 가물가물 뭔가를 한참 얘기하던 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엔 늘 만사가 짜증스러웠다. 물론 그래서, 별 얘기가 아닌데도, 아무튼 나는
닥쳐 개새끼야!
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그래서 엉망이 된 행사가 끝이 날 무렵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개새끼>가 누구야? 누가 한 거지? 몇몇 아이들이 눈빛으로 나를 지목하자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같이 밴드를 해보지 않을래?
그것이 B였다.
그후 우리는 학교에선 꽤 알아주는 록그룹이 되었다. <샘의 아들>이란 뜻의 샘즈 선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물론 학생들에겐 <닥쳐 개새끼야>의 샘즈 선으로 더 유명했다. 거참, 욕도 잘하고 볼 일인걸. 열광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B는 언제나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시절이었다. 욕만 잘해도 로커가 되던 시절이었고, 그저 두들기면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마치 거짓말 같다.
-
나는 그 거대한 욕탕의 바닥 위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피부가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수치의 온수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증기가 피어오르는 그 물줄기 속에서 나는 갑자기 혼자란 느낌이었고, 쓸쓸했고, 눈물이 났다.
그때였다.
등 뒤의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돌아보니 안개처럼 자욱한 수증기 속에 여태껏 본적 없는 크고 거대한 너구리가 이태리타올을 들고 서 있었다. 황갈색의 털과 좋은 대비를 이루는 훌륭한 연두색의 이태리타올이었다. 희뿌연 수증기 속에서 너구리는 모든 것을 지켜봤고, 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의자를 내밀며 너구리가 말했다.
앉아.
새벽의 사우나는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마치 친구와도 같은 한 마리의 너구리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등을 맡겼다. 참으로 등을 밀어본 지는 몇 년 만의 일이었고, 너구리는 무척이나 등을 많이 밀어본 솜씨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등의 때를 밀면서 나는 아주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구리의 마지막 손질이 끝났을 무렵에는, 비교적 즐거운 마음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서려는데 너구리의 묵직한 손이 내 어깨를 누른다.
아직.
뭐가 아직이지? 의아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비누칠이었다. 너구리는 말끔히 때를 민 내 등의 전역에 시원스레 비누칠을 먹였다. 이럴 수가. 그것은 말하자면 너무나 환상적인 플레이여서, 마치 비행기를 타고 오하이오 주의 창공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아,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아 하세요 펠리컨
-
뿅 쿵딱 뿅 쿵딱
-
간혹 외로운 밤이면, 심야전기처럼 저렴한 내 청춘이 흐린 전구처럼 못내 밤을 밝히기도 했다.
휴일이 되자 이럴 수가 싶은 수의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러 왔다. 퐁당퐁당 퐁당. 그래서 이곳의 가족들이, 혹은 커플들이 한 마리의 오리를 타고 앉은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묘한 연민의 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뭐랄까,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결같이 특별한 인물들이었다. 뭐랄까,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평일의 한낮에 이런 델 찾아와, 퐁당퐁당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이 그러나 세상에는 존재했다. 우선 근처에 러브호텔이 있었는데, 그것을 찾은 커플들이 많았다. 대머리의 남자나, 또 디룩 살찐 중년들이 팔짱을 낀 채 사무실의 쪽창을 두드렸다. 한 시간! 그리고 가능한 멀리 보트를 몰고 가, 그곳에서 키스를 나누거나 가슴에 손을 넣거나 했다. 오리배의 선체는 거의가 오픈된 것이어서, 멀리서도 그들의 동작이 훤히 보이기 일쑤였다. 열렬히 키스와 애무를 하면서도, 퐁당퐁당 퐁당 발로는 페달을 젓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면 뭐랄까, 역시나 저렴한 심야전기가 가슴속을 찌리릿 흐르는 기분이었다.
몰래 보트를 훔쳐 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퐁당퐁당 퐁당 잘도 저수지를 노니는 것이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호루라기를 불자 열심히 건너편 기슭에 보트를 대더니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어디에 사는 누군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정말이지 알고 싶었다.
쌍둥이를 데리고 온 주부도 있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대여섯 살쯤 돼 보였고, 주부는 어딘가 모르게 공부를 많이 했을 얼굴이었다. 시간과 요금에 대해, 그리고 규정 같은 것에 대해 그야말로 꼼꼼히 질문을 던지더니, 안전점검은 제대로 하느냐고 물었다. 무척 놀랐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아이들은 여섯 살이에요. 언제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예 예, 나는 박스를 뒤져 두 벌의 유아용 구명조끼를 찾아주었다. 다행히 딱 맞았고, 바느질의 상태도 드물게 튼튼한 것이었다. 해서 숨을 돌렸다 했는데 또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물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준비운동을 해야 한단다. 안 그러면 나쁜 어린이, 알지? 자 이제 선생님이 준비운동을 가르쳐주실 거예요. 그리고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 수 없이, 그래서 구령과 함께 체조를 해야 했다. 아는 체조가 PT체조밖에 없었지만, 그런 걸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시 후 아이들의 얼굴이 개나리처럼 노래졌다.
-
세상의 외곽에선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심야전기가 흐르듯, 퐁당퐁당 퐁당 퐁.
그것이 보트 피플이다.
'자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1) | 2016.11.24 |
---|---|
577 (0) | 2016.11.18 |
삶은 어쩌면 신기루같다 (0) | 2016.11.02 |
따뜻해져 (0) | 2016.10.15 |
봉태규 (1) | 2016.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