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역 가면서 읽고 그 다음날도 읽은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긋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았다 

오로촌이 멧돼지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라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 비석은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ㅡ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ㅡ북방에서 정현웅에게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ㅡ통영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제서 말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말이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ㅡ정주성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조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아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듯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ㅡ통영의 박경련을 사모했던 24살 백석이 쓴 산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