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ure nacre ::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르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 



/ 김민정

예컨대 그녀는 "삐친 자지처럼"(거북 속의 내 거북이)과 같은 비유를 구사하는 시인이다. 이 직유는 허를 찌른다. '시'라는 제도와 남근주의의 허장성세를 동시에 밟아버린다. 천박하고 외설적인가? 아니, 짜릿하고 통쾌하다. 우리가 차마 못한 말을 그녀는 한다. 이 솔직함은 포즈가 아니라 불가피한 전략이다. 위선적이지 않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란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 

예컨대 그녀는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눈알나무, 라고 그냥 읽어버리지 말고,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가 휘청거리는 나무'를 나의 감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쓸쓸하고 오싹하다. 온몸이 눈이 되어 세계를 경계해야 할 만큼 상처가 많은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쓸쓸하고, 그 수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심술궂게 나를 째려본다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 눈알들이 세상을 굴러다니면서 유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 그녀의 시집을 사이코드라마의 시화로 읽어도 좋다.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마침내 날아오르게 된 사연이 저 시집에 숨어 있다.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댄다 난 혼자 풀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 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가지 꽉 물어 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 스물 네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그 애인의 애인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 ㅡ '나는야 폴짝' 중에서


줄이 한 번 돌아갈 때마다 scene이 바뀐다.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여자의 연대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철없는 소녀가 스물여덟 처녀가 될 때까지 여자의 삶은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꼬마 ㅡ 소녀 ㅡ 사람'은 늘 '어른 ㅡ 사내 ㅡ 사람'한테 시달리면서 자란다. 잠깐만 방심해도 줄에 발이 걸린다. 삶의 어떤 고비들을 그녀는 이렇게 '폴짝' 넘어왔을 것이다. 이 폴짝은 무겁고 또 가볍다. 이 이중성을 이해하는 일이 김민정 시의 외부와내부를 함께 들여다보는 첩경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미친년 널 뛰듯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 한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고슴도치 아가씨의 폴짝은 제도의 중력을 거스르는 무거운 도약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시 역시 한국 여성 시의 어떤 계보를 잇는다. 문학사에는 돌연변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폴짝에는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다. 그래서 힘이 센 변종이다. 씩씩한 아가씨가 널을 뛴다. 원한도 신파도 없이. 미친년 널 뛰듯이.

젊은 시인들의 시는 다 요령부득이라는 식의 무지막지한 히스테리가 창궐하고 있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거북 속의 내 거북이) 맞다. 그녀는 때로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고 너는 왜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렸느냐고 힐난할 것인가. 점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불구다. 너와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노래. 미련곰탱이 아저씨는 모르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들은 아는 그 노래. 



(원한과 신파라는 말,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신형철도 결국 남성이다. 하지만 이 정도 다정하고, 이 정도 노력한다면 감히 좋은 남성이 아닌가. 그가 보여주는 남성의 언어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썩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것은 어쩐지 마음 아프다. 그는 노력한다. 그는 젠더를 뛰어넘기 위해 애쓴다. 결코 닿기 힘든 벽 너머의 여성을 이해하고자 미친놈처럼 널을 뛴다. 무모하게도 모든 언어를 사랑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조금 작아진다. 나는 그 만큼 노력하는가? 아니. 난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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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