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ure nacre :: 당신, 박범신

당신, 박범신

2016. 1. 6. 00:24 from 자개

105.

1959

아버지, 저 희옥이에요!

기체후일향만강 하옵시고, 라고 쓰진 않겠어요. 어른께 쓰는 편지의 서두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지만, 너무 고리타분해요. 아버지, 라는 호칭 역시 싫어요. 아빠라고 부를 거예요. 아빠라고 불러야 아빠가 곁에 있는 것 같거든요. 이렇게 인사하고 싶어요. 아빠, 저 대학생 됐어요, H대학교 무용과 일학년이에요, 하고요. 전위적인 무용가가 돼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는 게 제 꿈이랍니다. 언젠가, 아빠 앞에서 춤추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전 여전히 아빠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여기는 삼촌이 지은 암자예요.

스님이 된 건 아니에요. 전쟁이 끝나고 삼촌은 곧 재산을 정리해 여기에 암자를 지었지만 여전히 삼촌은 머리를 깎지 않고 지내요. 머리 깎은 스님은 따로 있어요. 사람들은 삼촌을 처사라고 불러요.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임신중이었던 숙모와 집을 지키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전쟁중 연이어 돌아가셨어요. “한시도 여기 남아 있고 싶지 않구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나를 고모에게 보내면서 삼촌이 하신 말이에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삼촌이 왜 암자를 지었는지 알고 있어요.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 삼촌의 생활은 스님보다 더 스님 같아요. 그런데도 삼촌은 당신을 가리켜 자꾸 화부火夫래요. 하기에 방마다 불을 지피고 보살피는 일을 삼촌이 전담하시니까 미상불 화부라고 불러도 이상할 건 없다고 봐요

이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M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요. 바닷가지요. 산 아래 큰절에서 한 시간 이상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와야 해요. 암벽으로 이루어진 험산의 봉우리 봉우리가 이 암자를 병풍같이 둘러치고 있어요. 길이 워낙 가팔라서 오는 도중엔 쩔쩔매지만 암자 마당에 들어와 돌아서면 누구나 아, 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요. 발아래 야산들 너머로 탁 트인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거든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아요. 물집투성이 세상을 통과한 뒤 기습적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초월의 세상과 딱 맞닥뜨린, 그런 표정요. 해가 질 때는 더욱더 그래요. 언제나 해낙낙하게 바다가 붉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떤 날의 놀빛은 후끈 복받쳐올라와서 보는 사람들의 애를 단번에 끊어놔요. 정체도 모르는 누구에게 갑자기 뺨을 호되게 맞은 듯한 표정이 되도록 하는, 그런 놀이 있어요, 아빠.

암자 이름도 낙일암 落日庵 이에요.

이제 아빠를 원망하지 않아요. 갓난쟁이 동생과 엄마가 죽고, 그리고 떠난 아빠잖아요. 아빠는 아마 죽은 동생과 엄마가 그 길을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도록 바다가 내다보이는 어디에 지금 절을 짓고 있을 거라 믿어요. 삼촌처럼요. 낡은 신문에서 본 아빠의 표정이 그랬어요. 절을 짓고 있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휴전선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 것이겠지요. 그 절에서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허우룩하기 한정 없는 눈빛을 언제나 느낄 수 있어요. 아빠는 실종된 게 아니에요. 누가 아빠에 대해 물어보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요. “울 아빠, 지금 절을 짓고 계셔. 남동생이랑 엄마의 영혼을 위로하는 절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절을 다 짓고 나면 나를 데리러 산을 내려오실 거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을 짓기 위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야. 울 아빠는 그런 분이셔!”

지금 해가 저물고 있어요. 바다와 하늘이 경계 없이 둘로 나뉘지 않은 채 놀빛에 흐뭇하게 붙잡혀 있는 게 보여요. 삼촌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여름이니 매일 군불을 땔 필요는 없으니까 삼촌은 화부 노릇을 잠깐 멈추고 있어요. 그 사람이 삼촌 옆에 있을 거예요. 내가 삼촌을 도우러 부엌으로 가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 옆에 있으면 가슴이 사뭇 벌렁벌렁해져요.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아빠. 아직 이름도 모르는걸요.

, 그래요, 아빠. 아빠에게 틈틈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 사람 때문이라는 건 맞을는지도 몰라요. 누구를 붙잡고라도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고 막 말하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삼촌한테는 말 못해요. 말할 데는 아빠밖에 없어요. 아빠만은 나의 고백을 다 받아줄 거라고 믿어요.

낙일암엔 현재 다섯 사람이 기거하고 있어요. 스님 한 분, 그 사람과 다른 또 한 명의 고시생, 그리고 삼촌과 저요. 밥해주는 공양보살님이 있는데 막내딸이 아기를 낳아서 해산바라지하신다고 어제 산을 내려갔어요. 다른 고시생은 학생이 아니라 서른살 조금 넘은 아저씨예요. 삼촌이 전부터 아는 사람인가봐요. 깡마르고 키가 커서 삼촌은 그 사람을 응달의 수숫대’f고 불러요. “어이, 수숫대!” 이렇게요. 말은 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지만 수숫대 아저씨는 공부도 일도 싫대요. “나는 길에서 길로 그냥 떠돌아다니는 게 제일 좋아아저씨의 말이에요. “자네는 어떤가, 일이야, 공부야, 아님 길이야?” 아저씨의 질문을 받고 그 사람이 한참 만에 우물쭈물 한 대답은 의외였어요. “저는, 길 위의 노래요.” “길 위의 노래? 뭔 노래?” 수숫대 아저씨가 다그쳤어요. “그냥요, 노래요.” 아침 공양을 할 때 주고받은 대화예요. 나는 암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어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에요.

전각은 비어있는 것처럼 조용했어요.

물을 마실 요량으로 무심코 물소리를 따라가다가 멈칫 멈춰선 곳이 바로 그 평상 앞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돌확 앞에 어떤 청년이 있는 거예요.

그는 웃통을 벗어부치고 맹물로 머리를 감는 중이에요. 나무토막들이 얹어진 지게가 세워져 잇는 걸 보면 산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막 내려온 청년 같았어요. 물러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어서 나는 어정쩡, 멈춰 서요. 소나무 그늘에 내가 있고 청년은 배롱나무 그늘에 있는 셈이에요. 돌확을 향해 엎드린 채 바라지 물을 머리에 쏟아붓고 있는 청년의 뒤태를 나는 가만히 보고 있어요. 전각 귀퉁이에 달린 풍경이 뗑그렁 뗑겅, 맑은 소리를 내고요.

그것은, 아빠. 아주 정갈하고 또 깜찍한 풍경이었어요.

엎드린 채 머리에 바가지 물을 끼얹고 있는 그를 단지 낯선 청년이라고 생각했으면 뒤로 물러나 피했을 거예요. 그런데 청년은 완연히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어요. 사람이 그처럼 안성맞춤으로 풍경에 편입돼 있는 건 도시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정경이잖아요. 바가지 물을 머리에 붓고 있는 그 몸짓도 얼마나 서분서분한지 그냥 하나의 풍경이었어요. 청년의 머리칼을 적시고 내려온 물이 꼬부랑 흘러 내 발 앞으로 달음질쳐 내려왔어요. 앳된 포말, 젖은 돌확, 그리고 배롱나무 반그늘이 청년의 벗은 등에서 숙부드럽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넋 놓고 보고 있었답니다.

조금 마른 몸이었지요. 그러나 상체를 한껏 숙이고 있는지라 어깻살은 어깻살대로 팔뚝살은 팔뚝살대로, 뭉쳐진 데 늘어난 데가 분명했어요. 뭉쳐진 데는 실팍하고 늘어난 데는 팽팽했고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깨 끝 둥근 옹이로부터 목으로 이어진 빗장뼈의 활대 같은 곡선과 불끈 들린 어개뼈의 극적인 오른이에요. 비상을 위해 새가 몸속에 바람을 가득 채우고 몸을 웅크리면 날개가 그렇게 솟아나올 거예요.

풍경의 심지를 본 느낌이었지요.

풍경에도 심지가 있다면요, 아빠. 눈빛도 강렬했어요. 인기척을 느기고 그가 상체를 들고서 나를 바라보았던 순간은 오래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나는 혼이 나간 듯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어요. 물이 막 흘러내리는 머리칼로 부분부분 가려져 있는데도 나는 그의 서느런 눈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어요. 당황했는지 그는 얼른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인 채 수평으로 펴든 수건을 좌우로 움직여 머리칼 물기를 타닥, 타닥, 터는 것이었어요. 물의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그가 내게 꾸벅, 목례를 한 건 그 다음이었어요. 마치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 학생처럼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던 모습 역시 오래 잊히지 않을 거예요.

그는 운동화를 반으로 꺾어 신고 있었어요. 나를 향해 목례를 하고 난 그가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끌면서 별채로 사라지는 걸 나는 계속 보고 있을 뿐이었어요. 하얀 마당에 끌리던 운동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요. 낯선 사람이니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을 법도 하건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방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탁 닫고 나서야 그에게 약간 무시받은 기분이 들었지요

아침 공양 자리에서, 수숫대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어요. “여기 조카님은 어떠신가, 무용과 다닌다고 삼촌한테 들었는데, 무용이 뭔가, 길인가, 공부인가, 노래인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숟가락을 놓은 뒤 얼른 방을 나왔어요. 그 사람이 내 앞자리에 있었거든요. 식은땀이 났어요. 아빠, 만약 그때 내가 정직하게 대답해야 했다면, 나는 일어서서 미친 듯 춤을 추었어야 맞아요. 그를 볼 때마다 그런 파동이 나를 사로잡으니까요. 그런데도 춤은 고사하고 말없이 나온 건, 아주 큰 토슈즈가 온몸에 씌워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맹세코 처음 겪는 낯선 감정이에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아빠!

우리 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네!”

아빠한테 편지를 쓰다가 어느덧 암갈색으로 잦아든 놀의 마지막 잔영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을 때, 한순간 또렷이 들렸어요. 아빠 목소리요. “우리 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네!” 아빠가 그 말을 할 때 웃고 계셨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분명히 아빠의 말을 들었어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지요. 아빠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빠, 나도 이제 스물두 살이에요. 스님들은 머리칼을 무명초라고 한대요. 머리를 깎고 나면 일시적일망정 어둠이 걷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아빠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순간의 느낌이 그랬지요. 알고 있었으면서 나 스스로 모호하게 미루어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빠는 내가 부정할 수 없게 분명히 말해주었어요. “첫사랑이라고요.

삼촌이 밥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고 있어요. 밥을 먹으러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토슈즈 때문이 아니에요. 삼촌이 열지 못하게 문을 잠가야겠어요. 눈물이 막 나요, 아빠, 왜 눈물이 나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내가 들은 사랑의 진실에 대한 소문의 하나는 첫사랑이란 이슬방울 같아서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만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내게 첫사랑이라는 말은 늘 슬프게 들려요. 첫사랑에서 을 뺀 사랑은 없는 것일까요. 첫사랑이 있고 다음, 그다음 사랑이 있고, 그래서 마지막 사랑도 있다는 소문은 무서워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냥 사랑인데요, 아빠. 삼촌이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말하고 있어요. “희옥아, 저녁 먹자!” 나는 눈물을 참고 짐짓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해요. “저 속이 조금 불편해 소화제를 먹었어요. 일찍 잘까봐요. “ 돌아가는 삼촌의 발소리, 공양간에 모여앉은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요. 그도 거기 있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이 편지를 써요, 아빠.

언젠가는 아빠가 꼭 읽게 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쓰기 시작한 편지인데 첫사랑이라는 낱말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불현듯 아빠가 영원히 이 편지를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어요. 꿈속에서 현실로 튕겨져나온 기분이에요. 편지도 보낼 수 없고 전화도 닿지 않는 북쪽 어디에 계시다면, 살아 계셔도 내 편지를 아빠한테 어떻게 전하겠어요. 스물두 살인데 나는 여전히 너무 어린가봐요.

슬픈 일을 많이 겪으면 슬픔을 이길 수 있나요, 아님 슬픔에 빠져 죽게 되나요? 죽음을 많이 겪으면 죽음을 이길 수 있나요, 아니면 죽음에 빠져 죽게 되나요. 더 겪을 것이 내게 많이 남아있다면 부디 말해주세요. 나는요, 아빠. 잃는 것보다는 피해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내일 새벽 혼자 산을 내려갈까봐요



Posted by 그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