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누경씨.”
기현은 아무 작정도 없이 불쑥 이름을 불렀다. 누경이 기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현이 눈만 맞추고 있자 노경은 기현의 시선을 털어내며 나이든 누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누경은 햇빛이 뜨거운지 검정색 파시미나를 벗었다. 반소매 옷 아래 음지식물의 줄기 같은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이 드러났다. 기현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한 심정으로 누경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런 팔은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무엇을 안아본 적도 없고, 햇빛조차 받은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옛날 착하고 가난한 남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신이 그에게 선물을 주었대요. 눈물을 담으면, 그 눈물이 진주로 변하는 마술 유리잔이었어요. 남자는 진주를 얻기 위해 매일 눈물을 흘렸어요. 매일 눈물을 흘리기 위해 점점 더 슬픈 일들을 만들어야 했죠. 진주가 생길 때마다 남자의 인생은 비극적으로 변해갔어요.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자, 어느 날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칼로 찔러 죽게 했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죠. 유리잔에 진주가 넘처흘렀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물었다고 해요. 그 남자는 왜 양파를 쓰지 않았을까요? 양파로도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텐데......”
몇 걸음 더 걷던 누경이 살얼음같이 투명한 얼굴로 말했다.
“......난, 양파를 쓰지 못했어요. 양파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말이에요. 난 내 스스로 나쁜 인생을 만들어요.”
기현은 양파를 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로는 울지 않았다. 위장에서 쓴물이 올라와도 결코 울지 않았지만, 다른 인간들의 진실에 직면하면,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삶을 기억하듯 참을 수 없이 울게 되었다. 기현은 누경이 자신을 울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누경은 자신의 눈물로 제 뿌리를 적시며 생존하는 기이한 사막식물 같았다.
44.
“정원. 아주 작은 것이라도 갖고 싶어요. 신씨의 초충도처럼, 내 정원의 꽃과 곤충들과 고양이에 관한 추억을 무덤까지 갖고 가고 싶어요. 대야만한 연못을 만들어 수초를 띄우고, 내가 좋아하는 자두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따라 일 년생 꽃씨를 뿌리고, 히야신스와 튤립 구근을 비좁도록 심고 싶어요. 한쪽엔 고랑을 파고 고추와 가지와 오이 모종도 심고 싶은데, 요즘 세상에선 정원을 갖기란 참 어려워요. 옛날 사람들은 누구나 가졌던 것인데 말이에요. 아주 가난한 사람부터 부자까지, 노인도 아이도, 누구나요. 지금은 정원이, 어쩌면 명품보다 더 사치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50.
삶에는 인간 개인의 내부의지뿐 아니라 섭리라는 외부의지가 틀림없이 작용했다. 그것이 이른바, ‘때’라고 하는 우주의 간섭이었다. 나와 세상을 구별 못하던 아이의 시간, 나와 타자를 구별 못하던 소녀의 시간, 생리를 하며 여자의 몸을 살게 되는 시간,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 자연으로까지 신체 감각기관이 열리는 시간, 인생과 싸우는 시간, 싸움을 멈추고 평화협정을 맺는 시간, 현재를 아는 시간, 나를 3인칭으로 여기는 시간, 긴장이 풀리고 선량해지는 시간, 죽음을 향해 돌아가는 고독의 시간, 육체를 잃고도 의식이 뭉쳐 있을 시간, 그마저도 해체될 시간......
64.
8
어릴 때는 이 세계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린 누경이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고향마을 너머에 또다른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였다. 무수히 많은 마을마다 해와 달리 떠서 하늘을 지나가고, 개울엔 물이 흐르고, 집들 사이로 오밀조밀 길이 나 있고,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이 부산하게 살아가고 소와 닭이 울고 라디오 소리가 들리고, 들판엔 곡식이 자랐다. 조금 더 자라 기차를 타고 도시들을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너머에 또다른 도시들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경 너머에 또다른 나라들, 또다른 나라들의 도시, 다른 마을들...... 세상은 넓게 펼쳐져 있지만, 실은 투명상자들 속에 셀수 없이 겹겹이 들어 있는 투명상자들같이 존재했다. 사람들 속의 진실 하나하나도 그렇게, 투명상자 속의 투명상자처럼,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겹과 층으로 포개져 제각각 따로이 존재했다.
어린 누경은 여름밤에 늦도록 밖에서 놀다가, 달이 누구를 따라가는지 알고 싶어 친구들과 사방으로 흩어져 달려가본 적이 있었다. 달이 모든 아이들을 하나씩 따라가는 것을 알았을 때, 누경은 놀라 진저리를 쳤다. 거대한 눈동자 같은 달은 증인처럼, 수호천사처럼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뒤를 밟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누경은 이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의 의미가, 과거를 이끌고 현재 위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인 것처럼 매순간 모든 시간이 결합하는 것이라면 시간이란 무엇인지, 분절된 현재가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이 아닌지......
71.
한 해 전의 낙엽처럼 상수리 나뭇잎들은 흙색으로 삭았는 데 비해 도토리들은 이제 막 도토리집에서 굴러나온 듯 여린 껍질이 반들반들 빛났다. 도토리들은 크기와 색과 모양이 모두 달랐다. 머리는 다갈색이고 몸은 초콜릿색인 짤막하고 앙증맞은 도토리, 머리는 금빛이고 몸은 갈색인 도톰하게 살찐 도토리, 연한 노란빛 머리와 모랫빛 몸의 유순하고 여린 도토리, 머리는 흰빛이고 몸은 연둣빛이고 꼭지는 푸른빛인 수줍은 표정의 도토리, 몸은 환한 노랑빛이고 꼭지는 선명한 민트그린색의 신비롭도록 유혹적인 도토리...... 아무도 가지 않는 숲속에, 그 작은 도토리들이 그처럼 생생하게 자기 존재를 투신하여 살아온 계절들은 반짝반짝 노래하고 있었다.
85.
어둑한 복도를 돌아다오는데 육중한 석조건물 전체가 텅 비어있는 듯한 정적이 느껴졌다.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져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이 지난 뒤에야 누경은 서강주를 알아보았다.
군청색 여름 양복에 흰색 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없었다. 서강주는 무심하게 지나갈 기세로 올라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듯 표정이 불안하고 험상궂었다. 서강주도 혼자 있을 땐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누경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계단을 막아섰다. 서강주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누경아.”
누경이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던 시절에 그가 누경을 부르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그 음성 속으로 지나간 모든 시간이 금맥처럼 흐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떠밀리듯 누경의 몸이 휘청하며 왼쪽으로 쏠렸다. 한 계단 아래 서 있던 그가 긴 팔을 뻗어 누경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누경의 왼팔을 붙들고 계단을 올라가 3층 로비에 안전하게 세워놓고 손을 뗐다. 야위었지만 악력이 강한 손이었다.
누경은 몸을 바로잡고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누경은 서강주가 입은 군청색 여름 양복과 흰색 와이셔츠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그 옷차림은 꿈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옷차림이었다.
“괜찮아”
서강주가 책을 주워들고 물었다. 어느 사이 험한 인상이 지워지고 그만의 독특한 표정이 돋아났다. 그 나이에도 내성적인 눈빛과 쑥스러워하는 듯한 풋풋함이 여전했다.
“아프네요.”
누경은 팔을 주물렀다.
“여긴 어쩐 일이지?”
“저번 봄부터, 학교 다녀요.”
서강주는 새삼 책을 확인하고는 누경의 안색을 살폈다. 서강주의 깊숙이 팬 눈은 전과 같지 않았다. 눈빛이 마모된 듯 누그러지고 지친 듯 흐릿했다. 그는 이제 해마다 빠르게 늙는 것 같았다.
“바쁜 일 없으면 차 한잔 마시고 가지?”
예전 같으면 도망쳤겠지만 누경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특유의 꼿꼿한 자세는 여전했다. 서강주의 연구실은 4층이었다. 몇 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도 인상에 남은 게 없었다. 창문과 출입문을 빽는 온통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었다. 창과 직각으로 책상이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 삼 인용과 일 인용 갈색 가죽소파와 오래된 목재 테이블이 있었다. 책상 곁엔 알루미늄 서류장이 있고 그 위에 꽃핀 양난 화분이 놓여 있었다. 창문엔 담쟁이넝쿨 한 줄기가 비스듬히 늘어져 있었다. 방 안에 익숙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누경은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강주는 양복 윗도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새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누경을 소파에 앉게 하고 선풍기를 틀어준 뒤 무선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녹차를 준비했다. 그런 사소한 동작들을 할 때도 그는 정확하고 단정하게 움직였다. 녹차와 함께 그가 서랍에서 꺼내놓은 것은 부채 모양의 테두리에 파래를 넣은 센베과자였다. 그 과자는 누경의 아버지가 담배를 끊은 뒤 즐겨 했던 군것질거리였다. 누경은 마음이 내킬 때면, 생과잣집을 찾아가 아버지의 군것질거리를 사서 시골집으로 부치곤 했다.
“졸업한 지 한참 지나 대학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간혹 있어. 나는 그 학생들 얼굴만 봐도 관상쟁이처럼 알아봐. 승진을 위해 왔거나, 전문직으로 이동하기 위해 왔거나...... 심지어 결혼을 잘하기 위해 오기도 하지.”
그는 물을 식혀 도자기 주전자에 부었다.
“누경 같은 얼굴도 있어.”
그는 차가 우러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경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길쭉하고 뼈가 드러난 손이었다. 여전히 군살이라곤 없는 약간 야윈몸이었다. 찻잔에 입을 댈 때, 녹차향보다 먼저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세상에 등을 돌리고, 강의실로 되돌아오는 거야. 아무 목적도 없이.”
그는 목적 없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 같은 얼굴을 보면 어떤데요?”
그는 누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예전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심지어 흐릿한 눈빛이 서글퍼 보였다.
“걱정이 돼.”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공기가 몸속에서 뭉클 떠올랐다. 어째서 그의 몸이 누경 자신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누경은 어릴 때 본 서강주의 얼굴을 결코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을 모르는 채, 어린 시절의 특별히 다정한 시선과 공기과 냄새와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의 기억이 아니라 체온과 체액의 기억이고 더듬이 같은 감각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을 단 하나로 표현하자면, 기쁨이었다. 체액 속의 기쁨, 체온 속의 기쁨,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에 밴 기쁨, 누경이 그를 보고 있는 동안 서강주도 누경을 바라보았다.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래 눈이 얽혀버린 시간이었다.
서강주는 수업중에 지루할 정도로 농담도 없고 재미도 없었지만 독특한 어법이 매력적이었다. 그의 말은 절제되고 정확하고 밀도가 잇었다. 대개 경직되고 차갑게 보이는데, 문득 드러나는 수줍음과 어색해하는 동작 때문에 여학생들은 그를 어려워하면서도 사랑스러워했다. 깊게 팬 눈과 뚜렷한 얼굴 윤곽과 큰 키와 바른 자세때문에 그의 별명은 르 클레지오와 제레미 아이언스를 합친 제레미 클레지오였다. 특히 그가 굳게 잠근 셔츠의 단추를 풀고 곧은 목과 길고 단단한 팔뚝을 드러내는 계절에 여학생들은 더욱 그를 화제에 올렸다. 잘 웃지 않는 그가 웃음을 터뜨릴 때는 강의실에 한동안 긴장감이 돌 정도였다. 대개 마지못해 미소 정도를 짓는 그도 한 학기에 두어 번쯤 공기까지 새하얗게 만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을 땜녀 수피가 새하얗고 줄기가 곧은 자작나무가 떠올랐다.
(중략)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 사십구재 때였다. 일 년 육 개월 전쯤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인사나 나누었을 뿐,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늘 비켜가는 셈이었다. 누경은 서강주와 자신이 얼마나 가깡누 사이인지, 혹은 얼마나 먼 사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직 방학인데, 강의가 없는 날도 그런 차림인가요?”
서강주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새삼스러운 듯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경의 옷차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경은 흰색 바탕에 바랜 초록색의 넝쿨잎사귀 무늬가 옆구리 선을 따라 치맛자락까지 이어진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납작한 샌들을 신고 잇엇다. 직장을 버린 뒤, 옷장에서 지긋지긋하던 정장들을 걷어 박스 안에 넣어버렸다. 정장들은 옷이라기보다는 가구같이 느껴졌다.
“나야 늘 이런 차림인걸.”
사실이었다. 그는 한결같이 그 차림이었다. 그것은 흔히 세상에 지친 가장들의 차림이기도 했다.
“마음이 한가해지는군. 인생이 아주 길어. 어느새 어른이 된 누경과 마주 앉아 잇으니..... 다니던 회사는 어떻게 되었지?”
“그만두었어요. 학교 다니며 유리공예를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부럽군.”
진심과 비웃음 사이의 음색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오빠들과 달리 간섭도 비난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깐 걱정된다고 하셨어요.”
“걱정도 돼.”
누경 역시 그런 양면성을 이해했다.
“유리공방에 앉아 있어면, 가끔 이상한 느낌에 빠져요.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잇는 것 같은......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세상 어딘가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난 그곳에 없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의 다른 곳에, 필름이 없는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있는 거예요.”
“걱정 마. 뭔가를 하다보면 곧 새로운 현실이 단단한 형태를 갖게 될 거야.”
누경은 훗, 하고 웃었다.
“모르시는군요. 전 그것을 못 견디는 거예요. 제 뜻과 다르게 굳어갈 인생의 단단한 형태에 갇히는 거요. 내가 공방에 앉아 있는 사이에 인생이 다른 곳에서 다 흘러가버려도 좋을 것 같아요.”
“......”
“대신, 그 순수한 공기 속에서 자발적인 리듬이 생겨나길 기다려요. 내 몸속의 것과 같이 흐르는, 지속하는 의식과 같은 리듬요. 그 리듬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를 전혀 구속하지 않을 거예요. 생명력 자체처럼, 능동적이고 자유로울 테죠.”
서강주의 눈 속에, 전혀 모르는 여자를 보는 듯한 당혹감이 들어찼다.
“왜, 인생이 자신의 뜻과 다를 것이라고 미리 상정하지?”
“이미 그러니까요, 시작부터......”
“잘못된 시작을 바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이지.”
“그러니까요.”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었다.
“일이 많은가요?”
누경은 상투적으로 물었다.
“수업에 들어가는 건 업무의 일부에 불과해. 잡다하게 치러내야 할 일이 많아. 나이가 드니 위로 아래로, 대외적으로 사람들과 얽혀 수작도 해야 하고, 조직 속에 있으니까. 때론 비열하고 천박한 사람도 겪어야 하고...... 주말에 뭔가 좀 해보려 해도 지쳐버려.”
그의 얼굴에 혐오가 어렸다. 처음 보았을 때에도 본 생경한 표정이었다. 그로 인해 잠시 그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혐오를 노려보는 듯도 하고 머릿속에 자리잡은 혐오를 지나서 세상을 노려보는 듯도 한 얼굴이었다. 그가 천박한 것과 비열한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누경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배운 모든 여학생들도 아는 바였다. 여학생들은 그가 공격당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취하는 우아한 방어라고도 했다.
“일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에서, 이를테면 누경의 유리공방 같은 곳 말이야. 그런 데서 몇 개월 푹 쉬면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그럴 형편이 아니지. 눈 깜짝하는 사이사이에 현재가 부서지는 기분이야.”
마지막엔 그의 음성이 늘어져고 짜증이 섞였다. 너무나 사적인 음성이어서 누경은 놀랐다. 꼿꼿하기 그지없던 그가 누경에게 인간적인 푸념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해 누경은 자신이 한결 어른스럽게 느껴졌고, 그 역시 보통의 남자들처럼 순순히 나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쉽게 열리는 헐거운 문처럼 편안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늙어갈 것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즐거웠다. 누경은 방긋 웃었다.
104.
14
공원 숲길의 단풍나무 잎들이 불꽃처럼 타는 듯했다. 차가운 불꽃 숲에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서강주는 더 창백해 보였다. 두 사람은 호숫가 공원을 말없이 걸어갔다. 팔과 팔이 닿을 듯 둘 사이의 공기를 스쳤다. 누경은 곁에서, 라는 말의 의미에 가슴을 떨었다. 가족들 속에서, 친척들 속에서 그를 마침내 떼어낸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사적으로, 서강주와 단둘이 걷는 것이었다. 사적이라는 말에 함유되어 있는 자유로움과 비밀과 냄새에 이마가 뜨거워졌다. 큰 키와 바른 자세와 긴 다리 긴 팔 때문인지, 서강주의 곁은 공간적인 구도처럼 느껴졌다. 이 세계의 그 어느 곳에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지극히 아릅답고 각별한 유적이나 풍경 속에 들어선 것처럼.
“아버지와 추억이 많니?”
서강주가 물었다. 누경은 실망스러웠다. 서강주는 기껏 누경의 아버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누경은 열여섯 살 이전의 일들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애써 기억하려 해도, 이야기는 없고, 스냅사진처럼 장면 장면만 겨우 떠오를 뿐이었다. 그마저도 빛에 과다노출된 사진처럼 뿌옜다. 기억하려 하면 잠금장치처럼 작동되듯 이내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 어린 시절엔 어디든 아버지 손에 잡혀 다녔어요.”
누경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물 쪽을 바라보았다.
“유채꽃이 핀 들판과 발 아래로 강이 흘러가던 무서운 절벽길과, 연잎이 덮인 늪과, 조각배가 떠 있던 호수와, 모래운동장 같은 곳, 빠르게 물이 들어와 차던 바다도 모두 아버지 손에 잡혀 처음으로 보았어요. 어렸지만 전 존재를 압도하는 듯한 그 풍경들 앞에서 난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 손가락들을 더욱 꽉 잡았죠. 아버진 친구들의 모임에도 나를 데려갔어요.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물론이고, 현충일과 광복절 행사 같은 기념식에도, 또 예쁜 마담이 있는 다방과 술집에도 아버진 나를 데리고 다녔어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무릎 위에서 놀았어요. 집안일이 많은 엄마에게 딸아이는 머리를 빗기거나 옷을 갈아입히거나 목욕을 시키거나, 늘 좀 거친 손으로 급하게 해야 하는 일거리일 뿐이죠. 그러니 여자애에게 아버지는 이상한 존재예요. 아버지와는 집에서 노니까요. 아버지의 손과 팔, 아버지의 목과 가슴, 장딴지와 발, 아버지의 음성, 그런 것에 안겨 남자를 경험하며 자라죠.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법도, 여자답게 앉는 법도 세상에서 배운 첫 노래도, 아버지한테서 다 배웠어요. 슬픈 노래였어요.”
“옛날 노래들은 다 슬펐지.”
“소녀기를 지나면서, 아버진 갑자기 금지의 상징이 되었어요. 알고 보니 차갑고 경직된 사람이었어요. 군인처럼요. 중학생이 된 뒤로는 늘 아버지가 무서웠어요. 다정한 적이 없었어요. 나와 눈도 잘 안 마주친걸요. 무언가를 금지할 때나 나를 똑바로 보았죠. 아버진 이상한 논리로 제게 책조차 못 읽게 했어요. 소설책이든 잡지책이든, 금서였어요. 영화 보는 것도 싫어했죠.”
“어떤 논리지?”
“잘못된 욕망을 생기게 해 인생을 어지럽힌다는 거예요. 어른이 되어 자기 판단력이 갖춰진 뒤에 접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사는 것은 삶의 기본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맞는 말이기도 해.”
“설마, 동의하신다는 거예요?”
“사실 인생은 단순한 것인데, 책이나 영화 같은 것들 때문에 공연히 복잡해지기도 하거든.”
“농담이죠?”
“난 농담 안 해.”
누경은 어이가 없어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농담 안 해, 라는 말이야말로 농담일 것이었다.
“나중엔 제가 옷 입는 것도 간섭했어요. 짧은 치마나 블라우스 같은 여성적인 스타일도 싫어했지만 청바지나 점퍼는 더 질색했어요. 천박히 보인다나요. 늘 치마를 입으라고 했어요.”
“나도 치마가 좋아.”
“왜요?”
“남자들은 입을 수 없는 옷이니까. 그리고 예뻐.”
“아버지와 닮았군요.”
누경은 편견이 아니라 사적인 취향이기를 바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내 아버지보다는 차라리 누경 아버지를 닮고 싶었어.”
서강주의 눈빛에 고즈넉한 슬픔이 어렸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낳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비정했다는 것을 누경도 알고 있었다. 누경은 그를 위로하듯 가볍게 말했다.
“두 분은 무척 닮았어요.”
그 순간이었다. 한쪽 발이 푹 꺼지며 누경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순식간에 지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서강주의 팔이 재빠르게 누경의 허리를 잡았다. 맙소사...... 멀쩡하던 구두 굽이 부러진 것이었다. 부주의한 여자애들이나 겪는 말도 안 되는 사고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누경에게, 하필이면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호수를 꼭 절반쯤 돈 상태여서 주차장까지도 거리도 가장 먼 위치였다. 어차피 같은 거리여서 두 사람은 그 자세로 계속 걸어야 했다.
칠 센티 정도의 굽인데도 누경의 걸음은 심하게 절룩거렸다. 한쪽 다리가 아래로 푹푹 빠졌다. 매달릴 데라곤 서강주의 팔뿐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깔끔한 서강주를 낭패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로 솟아버리고만 싶었다. 운동하는 아주머니들이 노골적으로 질타의 눈빛을 던지며 지나갔다. 누경은 얼마 못 가 벤치에 앉아버렸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누경이 불쑥 물었다.
118.
12월 11일
학교 앞 찻집에서 뜻밖에도 서강주를 보았다. 나는 상미와 앉아 있었다.
“서강주야.”
그를 본 상미가 속삭였다. 여학생들은 제레미 클레지오 내지는 서강주라는 이름을 서슴없이 불렀다. 그가 우리 쪽을 힐긋 보았다. 그의 눈길이 한순간 내게 머물렀다. 그 짧은 순간 강력한 전류가 머리카락 밑 모근 사이를 빛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두피가 저릿했다.
상미는 늘 앞으로 쓰려고 하는 동화의 줄거리를 내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말을 해야 정리가 잘된다고 했다. 시놉을 쓴 뒤에도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세 번쯤 내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마다 내용이 달라졌다. 지루하지만 말을 해야 쓸 수 있다니 나는 견뎌야 했다. 우리는 샌드위치까지 시켜먹으며 두 시간 가까이 찻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틈틈이 전날 공방에서 얻어온 조그만 초록색 유리판을 눈에 대고 서강주 쪽을 훔쳐보았다. 실내가 숲속처럼 온통초록빛이었다. 서강주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일행인 남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잘 지내나?”
그는 누구에게랄 것이 없이 안부인사를 했다.
“둘은 늘 붙어다니는군.”
“실은 그래서 문제예요. 연애가 안 되거든요.”
머리카락을 도토리처럼 짧게 자르고 블랙으로 염색한 상미가 하소연했다.
“연애하는 거보다 보기에 좋은걸.”
서강주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교수님 이상하시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둘이 그만 떨어지고 결혼하라고 성환데......”
“난, 결혼하는 거 다른 사람들에겐 권하지 않는다. 죽어서 지옥 갈 것 같아서.”
상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도 그냥 결혼은 안 해요. 만약 한다면 제대로 할 거예요.”
“제대로라니?”
그는 내 쪽을 보며 물었다. 상미가 대답했다.
“결혼 당사자끼리 최대한 공정하게 계약조항을 만들고 공증을 받는 거죠.”
서강주는 내게 시선을 둔 채 상미의 말을 흘려버렸다.
“그건 뭐니?”
그가 내 찻잔 곁에 놓인 초록 유리판을 가리켰다. 나는 유리판을 눈에 대고 그를 빤히 보고는 뗐다. 서강주는 내가 한 짓을 그대로 따라 해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초록 네버랜드군.”
그는 십여 분쯤 앉아 있다가 나가며 우리 테이블의 값도 계산해주었다.
그것을 본 상미가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저렇게 자상해졌니? 아까 보니까, 오늘따라 우리를 보는 표정도 뭔가, 전에 없이 다감한 게...... 눈에서 살강누 것이 자글자글 흘러나오는 거 같더라.”
상미가 음성을 바짝 낮추어 속삭였다. 자칭 피부미인답게 단단한 흰 피부에 뺨이 발그레했다.
“서강주는 옛날보다 쉰 살이 살짝 지난 지금이 더 근사해. 제레미 아이언스도 르 클레지오도 다 늙었는데, 서강주는 아직도 청청하게 살아 있어. 옛날부터, 저자와는 연애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너무 무서워서 숨도 안 쉬어질 것 같아......”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미의 손등을 내 손으로 덮었다. 그즈음 나의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서움. 상미 말대로, 나는 가슴이 터질 것같이 무서웠다.
“아까 유리판을 대고 너를 볼 때 말이야,”
상미는 내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둘이 꼭 연인 같더라.”
129.
오디오를 켜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수저질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 술 따르는 소리, 비워진 도자기 술잔이 식탁에 닿는 소리......
눈이 내리듯, 조용한 식사시간이었다.
우리 두 사람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둘다 매정하다. 우리는 둘 다 겁이 많다. 우리는 둘 다 내면이 강인하다. 우리는 둘 다 이기적이다. 우리는 둘 다 순수하다. 우리는 둘 다 고집쟁이다. 우리는 둘 다 선량하다. 우리는 둘 다 나쁘다. 우리는 둘 다 이 일이, 어떤 형태도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둘 다 부도덕하다......
초밥에 올려진 회는 싱싱하고 밥은 이제 막 뭉친 듯 미지근했다. 미소국물을 삼키니 속이 편안해졌다.
“우리 여행 갈까?”
나는 놀랐다.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 너와 단둘이 깊은 산속에 가 있고 싶어.”
“정말요?”
“다음부터는 내가 한 말에 정말인지 되묻지 말아.”
나 자신이 경망스러운 여자처럼 여겨졌다.
“나와 함께 여행갈 수 있니?”
“언제요?”
“이번 겨울에, 곧.”
나는 훗, 웃었다.
“왜 웃지?”
“우리가 속물적인 거 같아서요.”
“속물적인 게 어떤 거지?”
서강주는 들어보자는 듯 기다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단념했다.
“말로 하긴 곤란해요.”
서강주는 뜻밖의 재미있는 대답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것은 존재와 삶 사이의 속임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진실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삶을 속이거나, 혹은 삶에 속는 것...... 학기는 이미 끝이 났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았다. 삶에 속거나 삶을 속일 시간.
“어디로 가죠?”
“내가 알아보마. 춥고 깊은 산골을.”
“추워야 해요?”
내가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아주 추워야 해.”
“왜요?”
“그래야 우리의 따뜻함이 속물적이지 않을 거야.”
단둘이 있는데도 더욱더 단둘이 있고 싶었다. 자신이 하려는 행위를 의심하듯 그는 손가락 끝으로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밥냄새와 미소국 냄새와 맑은 생선 냄새와 바다 냄새와 깊은 산골의 냄새가 차례로 지나갔다.
12월 25일
이게 무엇일까, 묻지 않을 것이다. 묻기 시작하면 더욱 모호해진다.
크리스마스이다. 나는 혼자 있다. 그는 오늘도, 가능한 것을 하는 것과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내게 가르친다. 우리 사이에 가능한 것을 적어본다. 너무 빈약하다.
133.
1월 3일
당신은 내 귀 속에서 잠을 잔다. 당신의 작은 기척에도 나는 놀라서 잠을 깬다. 당신은 어떻게 내 귀 속으로 들어왔을까...... 당신 안에서 나는 눈을 뜬다. 당신 안에서 난 잠이 든다. 나는 어떻게 당신 안으로 들어갔을까? 당신은 어째서 이 세상만큼이나 클까? 내가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 당신 안에서 사는 것일까? 다른 남자들, 친구들, 일, 백화점, 음식, 맥주조차 맛을 잃었다. 도무지 세상과 공명이 없다. 나는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것, 원하는 것은, 눈빛, 그 눈빛이 나를 보는 그 순간 속에서, 혹은 그 눈빛이 나를 본다는 약속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135.
1월 16일
어떤 확신을 가진 것처럼, 전화도 해보지 않고 곧장 그의 연구실로 갔다. 속눈썹가지 얼어붙는 듯 추운 날씨였다. 계단을 오를 때, 내가 연구실에 온 것은 이 세상 사람 누구도 모를 거라고 믿기로 했다. 망설임 없이 4층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였다...... 그의 놀란 눈에 기쁨이 활작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고 전화를 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보자 와락 반가워했다.
“들어와.”
그는 서둘러 나를 연구실 안으로 잡아끌었다
“춥지?”
그는 따뜻한 두 손으로 장갑 낀 내 손을 감쌌다. 내 손은 장갑속에서도 얼어 감각이 없었다.
“앉아.”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난로를 가까이 당겨왔다. 그리고 마주 앉아 한동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아무 기약 없이 애태우며 기다려온 사람이 내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듯 절실한 눈이었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갈등의 흔적을 발견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순수하게 만난 것을 기뻐할 뿐이었다. 그에겐 애당초 우리 관계에 대한 어떤 의도나 의지도 없었다. 기운이 빠지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늘 여기 와 계세요?”
“그렇지.”
겨우 여기 이러고 있으면서, 왜 내게 오지 않았느냐고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뺨이 붉어졌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온 탓이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나는 그제야 장갑을 벗고 손을 비볐다.
“여기서 뭐 하시는데요?”
“좀 쓸 게 있어.”
그의 책상 위에는 한 작가의 소설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평론작업중인 것 같았다.
“바쁜가봐요.”
“괜찮아.”
서강주는 어색할 만큼 빠르게 대답했다.
“커피 할래?”
“주세요.”
서강주는 꽈배기 무늬가 들어간 파랑색 터틀넥 스웨터와 회색 코르덴 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편안해 보였다. 골격이 길고 가슴이 편편하고 채식주의자처럼 살이 없었다. 답답할 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까다로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고, 심지어 약간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남자의 유형이었다. 그는 물이 끓는 동안 커피를 갈았다. 방 안에 신선한 커피향이 퍼졌다.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섬세하고 단정했다. 투명한 유리주전자에 떨어지는 커피방울이 햇살을 받아 불꽃 같았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마음이 이내 낮게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햇살을 가득 받는 안데스 산맥의 넓은 커피밭 풍경이 평화롭게 떠올랐다.
내 반응을 살피고서야 그는 마시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게 좋은가요?”
“좋아.”
“그런데 왜 전화 안 하세요?”
“참는 거다.”
“왜요?”
“그것도 좋아. 너를 참고 있는 마음이 맑고 낮아서 소중해.”
나는 힘들어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를 허용한다. 내가 하루하루 애태우는데도 그는 이곳에서 태만하게 서성거리는 것이다. 서강주는 이 일이 무엇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우리는 흘러갈 것이다. 어느 날 끝이 날 때까지...... 그런 그에게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 마음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견디듯, 내 마음은 내가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는,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그렇게 앉아 있을 사람이었다.
“어젠 비가 와서 힘들었어요.”
“비가 왜?”
“마음속의 빈 상자들이 젖어서 모두 무너졌어요.”
그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비는 비일 뿐이야. 다음에 비가 올 때는 그렇게 생각해.”
(중략)
늦가을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깊은 숲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뭇잎에 고인 차갑고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작은 곤충이 풀잎 위를 지나가는 소리, 거미줄을 흔들며 지나가는 거미의 기척, 나뭇가지에 앉아 부리로 깃털을 다듬는 새의 뒤척임, 청설모나 담비 같은 작은 짐승이 숨어 눈을 깜박이는 그런 소리까지도 들리는 것 같은 고요였다.
(중략)
“내가 마음대로 해서 나빴나요?”
나중에 묻자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해서 좋았다. 하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
“결국 나무라네요. 전화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라구요?”
“네가 아까워서 그런다. 네가 아까우니 이러고 다니지 마.”
그가 엄하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무엇을 묻는 듯이.
1월 17일
처음으로 그가 안부전화를 해주었다.
“뭐 하고 있었니?”
음성 속에 눈이 녹은 봄물 같은 풋냄새와 경쾌한 숨결이 있다. 청년같이 상큼한 음색이었다. 생소한 음성, 나를 향한 그의 설렘일까?
“산책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날씨가 추운데?”
“햇빛이 괜찮아요.”
“옷 든든히 입고 목도리와 장갑도 꼭 하고 가.”
“왜 전화했어요?”
“네가 어제 가면서 오늘 꼭 안부전화해달라고 했잖아.”
나는 웃었다.
“보고 싶군.”
바위가 굴러와 떨어진 듯 마음이 출렁, 흔들렸다.
“벌써요?”
나는 얼빠진 채 반문했다.
“벌써라니, 다음부턴 그렇게 말하지 말아.”
그의 마음을 전혀 종잡을 수 없다. 이런 땐 의심의 여지 없이 다감하다.
“제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건가요?”
“네가 부탁해서 했다. 전화는 중요하지 않아. 난 요즘 늘, 네가 보고 싶다. 알겠니?”
그러자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요?”
나는 또 바보처럼 되물었다.
“정말이냐니, 누경, 그렇게 말하는 법이 아니다.”
나는 그가 드러내는 마음이 버거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음 주에 여행 가자. 일박 이일만 잡을게.”
“산속으로 가나요?”
“정선으로 갈 거야.”
“그렇게 먼 곳으로요?”
그곳은 내게 전설의 공간처럼 머나먼 산간지방이었다. 외국처럼 멀게 느껴졌다. 거친 근육 같은 산맥들, 긴긴 계곡, 검은 돌이 쌓여 있는 폐광산들과 버려진 탄광촌, 가난과 외로움의 부랑, 추위와 고요 속에 폐허의 외딴집들이 띄엄띄엄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눈이 많이 쌓였을 거야. 우린 제대로 옷을 입고 가야 해. 나는 코트 속에 양복은 입고 넥타이를 맬 거야. 누경인 코트 속에 가장 예쁜 옷을 입어. 투피스를 입어. 춥지 않게 두꺼운 스타킹을 신고 구두를 신고 화장을 잘 해.”
“왜 그래야 하죠?”
“의식처럼 진지한 여행이니까. 우린 옷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밥을 먹고, 옷을 단정하게 벗어 옷장에 걸어두고 단정하게 잠자리에 들 거야.”
그는 이미 많은 생각을 해 둔 것이었다. 그가 생각했을 시간들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의외로 내 생각을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때 내가,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
“그때 내가,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
“그때 내가, 너라고 불러도 되나요?”
마지막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돼.”
“......”
침묵 속으로 눈물이 날 것 같은 따스함이 지나갔다.
“잠옷도 가져갈까요?”
“순면 소재에 소매가 길고 따뜻해야 돼. 그리고, 흰색으로 가져와.”
“왜 흰색이죠?”
“눈 덮인 산속에선 그게 어울려. 바지는 절대로 안 돼. 치마여야 해.”
그는 또 한번 나를 웃게 했다. 단정하고, 엄격하고, 어쩌면 편견이 심하고, 나이 많고 이렇게 귀여운 사람......
“네 웃음소리가 좋구나. 어제는, 너를 둘러싼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아팠어.”
“아름다움이 왜 아프죠?”
“너무 맑으면 아파.”
문득 눈앞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아파왔다. 그러나 나는 맑지 않다. 나는 탁하다. 나는 부도덕하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부도덕하게 보겠죠.”
“걱정 마,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너는 여전히 티 하나 묻지 않고 예쁠 거야. 도덕도, 부도덕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장해.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걱정 마. 내가 잘 보호할게.”
그 존재가 발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발견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은 그 정신의 질서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차가운 합리성과 뜨거운 초연함과 담백한 세속성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엉터리인 줄 알면서도 그 지독한 편견들마저 사랑스러웠다.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몸을 굽혀 차가운 책상에 가만히 얼굴을 댔다. 내가 푸른 잎사귀마다 총총히 이슬을 매단 숲속의 작은 잡목처럼 느껴졌다.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144.
“이런 곳에서 살아봤던 것 같다.”
양복 차림에 넥타이까지 맨 서강주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서강주가 내 코트에 달린 모자를 머리에 씌워 양쪽 귀를 감싸 주었다.
“예쁘구나.”
나는 선홍색 순모 코트를 입고 같은 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두거운 비둘기색 스타킹과 밀크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우리 둘이 이런 곳에서 살아봤더라면......”
“그랬으면, 좋았을까요?”
“좋았을 거야. 우리가 전에 함께 살아본 사람이면 좋겠다.”
“왜요?”
“그러면 지금 같이 살려고 애태우지 않아도 될 테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 몸속으로 누구인지 모를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애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떨려왔고, 그사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강주가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갑자기, 왜 그러니?”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전에,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 우리 두 사람, 행복하게 살았던 것만 같았다. 그가 손으로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들어가자. 추운 데서 울면 얼굴 상한다.”
“미워요.”
“왜?”
“둘이 살다, 짧은 행복을 남기고, 도망간 남자 같아요.”
“너를 두고?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
그가 정색을 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웃고 말았다.
157.
“우동 국물에서 당신 몸냄새가 나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내가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별소리를...... 하는 금지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이 조도가 낮아지듯 어두워졌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곧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오늘따라 말이 더 없었다. 그는 과묵함 속에서 어떤 말들을 지우고 있을까? 나는 그를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해일지 모른다. 실제로는 그가 말을 해도 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너무 간결한 말, 지나치게 밀도와 강도가 높은 말, 앞뒤를 토막친 채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함축된 말, 나는 그 말들에 대응할 수도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실 때, 그가 홀연히 말했다.
“사랑해.”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처럼 놀랐다. 한순간 심장이 외기에 노출되어 핀셋에 지그시 찔리는 느낌이 들 만큼 생경하게 아팠다.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침대 속도 아닌데, 그는 말갛게 갠 정신으로 분명하게 그 말을 했다. 타인이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만나온 기분이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하다고 언술하는데도 그 말의 효력은 예상과 달리 커지지는 않았다. 사랑보다 세속에서의 명예로운 삶은 더 중요하게 여기는 중년의 남자에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어 한마디 한마디마다 추를 매달 수도 없었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말했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는 무엇인지 모른 채로 계속해왔고 그에게 굳이 묻지도 않았다. 사랑보다 더 광범위한 무엇인가를 해온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 그로 인해 불행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는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았다. 요구가 생기고 원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흐릿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 사랑이 헛것처럼 무너질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이것이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언제까지나 그를 무고하게 남겨두겠다고. 그것이 내가 이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작가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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