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웃는 남자
394.
나는 디디를 동창생으로 만났다. 우리는 어렸을 때 같은 학급에서 공부했다. 나느 그때 디디를 잘 몰랐다. 머리를 늘 뒤쪽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던 조그만 여자아이, 매일 똑같은 조끼를 ,누군가가 손수 뜬 것처럼 보이는 초록색 헌 조끼를, 당시의 조그만 몸에도 꼭 끼게 입고 다녔던 여자아이로, 얼핏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 동창회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작았고 별 말이 없었다. 그녀는 쑥쓰러워하면서도 자주 내 눈을 바라보았고 나는 뭔지 모르게 그녀가 바라보는 것, 이따금 말하는 것, 듣고 있는 모습 같은 걸 보는 게 좋았다. 디디는 잘 먹고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 엉뚱한 것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그 생각에서 한참 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맛있는 것을 솔직하게 기뻐하며 먹었고 시간을 들여 책을 곰곰이 읽은 뒤 거기서 발견한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색실을 사용해 티셔츠 따위의 구멍 난 자리에 무당벌레 같은 것을 소박하게 만들어두곤 했다. 여름에 넓은 나뭇잎을 줍게 되면 잎맥을 절묘하게 잘라내 숲을 만든 뒤 내게 보여주었다. 작은 것 속에 큰 게 있어. 나는 그런 것이 다 좋았다. 디디가 그런 것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디디는 부드러웠지. 껴안고 있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안아버릴 때도 있었어.
399.
더 행복해지자, 담배와 소변 냄새가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다짐하고는 했다. 행복하다. 이것을 더 가지자. 더 행복해지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것 한 가지를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에 이르면 디디가 햇빛에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
400.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은 아닐까. 어떤 인간인가, 나는.
끈질기게 떠오르는 일이 있다.
몹시 건조하고 무더웠던 한여름의 일이다. 입을 벌리면 체온보다도 뜨거운 공기로 금세 입천장이 말라버릴 정도의 폭염이었다. 햇빛을 정수리로 받으며 속수무책으로 서 있어야 하는, 차양도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조금 멍해진 채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도로 위로 투명한 폭포처럼 아지랑이가 끓고 있었다. 그때 내 곁에 서 있던 노인이 내 쪽으로 쓰러졌고 간발의 차이로 나는 그를 피해 비켜섰다. 다갈색 바지에 흰 면 셔츠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조짐도 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조금 전가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퍽, 하고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 버스가 당도했고 나는 버스를 탔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마침 도착한 버스에 탔다. 그게 다였다. 죄책감을 느껴서 도망을 치고 싶었다거나 뭔가를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 죄책감이라니...... 저 사람이 쓰러진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저 사람은 무더위 때문에, 자신의 몸 상태 때문에 저절로 쓰러졌는데 그게 내 탓인가. 쓰러지라고 내가 저 사람을 떼민 것도 아닌데...... 나 말고도 사람이 더 있었으니까 아마도 누군가가 조치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툭툭 털고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정류장에서 멀어졌다.
그 뒤로도 이따금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무감하게 나는 그 노인을 생각했다. 디디가 죽은 뒤로는 더 자주, 그를 생각했다. 이제는 불로 새긴 작은 자국처럼 그의 모습이 기억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다. 뙤약볕 아래 짧고 짙은 그림자를 거느린 채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쓰러져 있던 노인. 그 뒤에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지는 않았을까. 죽지는 않았더라도 치명적인 상해를 입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것은 내 탓인가. 결정적으로 내 탓인가. 내가 비켜서지 않았더라면 그는 괜찮았을까. 재빠르게 판단을 해서 그의 몸을 받았더라면 아니지 판단이고 뭐고 없이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적어도 퍽, 하고 머리를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판단이고 뭐고 없이...... 그런데 나는 그러게 하지 않았지. 판단이고 뭐고 없이 그렇게 하는 인간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어째서일까. 나는 도대체 뭔가.
조금도 단순해지지 않는다.
어떤 인간인가 나는.
402.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자글자글 들려올 정도로 버스 안은 고요했다. 혁명, 하고 디디는 말했지. 뻐국, 하는 것처럼 혁명, 하고.
오뚝이와 지빠귀
나는 기조를 넘겨받는 데 이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창구 안쪽으로 건너간 그는 기조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좌우로 흔들어보며 굳기를 확인하더니, 어금니를 뽑듯 의자에서 기조의 몸을 쑥 뽑아냈다. 그가 기조의 발뒤꿈치를 질질 끌며 두 개의 창구를 지났다. 최대한 사무실의 가장자리를 타고 이동하여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화분을 세우듯 기조를 끙, 하고 내려놓았다.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배웅을 받으며 나는 기조를 옮기기 위해 기조의 허리를 안았다.
기조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거웠다. 작아진 비율에 정비례한 정도로 밀도가 높아진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