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ure nacre :: 인터내셔널의 밤, 박솔뫼

인터내셔널의 밤, 박솔뫼

2020. 1. 31. 23:32 from 자개

p. 22

한솔은 영우가 나오는 연극을 몇 번 봤었다. 대학 연극부 공연을 매번 봤었고 영우는 졸업 후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극단 활동도 했었는데 그때도 두어 번 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영우는 바쁘고 고되었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며 극단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고 가고 싶은 학교의 입학 준비도 했었다. 한솔은 영우가 일본에 간 이후로 연기에 대한 생각을 접은 건지 묻지 않았는데 영우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영우는 그러고 보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기분이었고 하는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고 지금 명동에서 일하고 있어. 11월에 시험이 있으니까 끝나고 연락할게. 다다음 달에 일본에 가. 같은 실제로 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p. 27

학교에서는 이전의 시간을 아주 희미하게만 기억하는 각자가 나란히 앉아 뭔가를 참는 것을 배우게 된다.

-기차라는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면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어딘가로 가고 있기에 서사가 알아서 진행된다. 서사에 대한 강박이 줄어들고 캐릭터를 더 진하게 할 수 있다.

 

 

p. 31

한솔도 그즈음 일을 그만두었고 달리 할 일이 없어 영우를 자주 만났다.

-K와 내가 돌아가며 시간이 많았던 것이 생각난다.

 

 

p. 37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p. 45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교단은 사이비는 아닌데 아니 사실 사이비가 맞을 것인데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오랫동안 종교로 삼고있던 곳이라 사이비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마음속으로는 좋지 않은 곳이라고 불렀다. 혼잣말로라도 사이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 부산으로 가면 이모가 소개해준 곳에 가서 일을 하며 다시 학교를 다닐 준비를 할 것이다. 대학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배울 것이다. 간신히 그런 마음을 먹는 데까지 이르렀다. 무척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p. 56

카프카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하며 글을 썼지만 카프카의 근무시간은 오후 두세 시면 끝이 났다.

 

p. 64

아직은 간단한 일을 해도 왠지 긴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붙잡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끌고 가지 않는다. 나미는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해 어쩌면 열차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69

유미 씨는 탐정만 만나봤겠냐고 야쿠자도 만나보고 나훈아도 만나봤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런 이야기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도 안 만나봤고 술 취한 아저씨들만 많이 봤다고 했다.

 

p. 70

아니면 성당에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당에서 신실하지 않은 마음으로 평범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서양의 종교와 교양을 배우는 마음으로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나미는 다른 무언가를 믿길 원한 방금 전 자신을 생각했다.

 

p. 78

가수세요?

노래하면 다 가수지. 가수가 따로 있나?

 

p. 79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을 정도로 적당한 소리였다.

 

p. 81

그 시간에 왜 사람이 없냐면, 내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라 그렇지.

크루즈 안 홀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친 승객들을 위한 쇼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참석한다. 쇼에 참석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층침대로 된 객실에서 잠을 자고 예민한 사람들은 멀미와 싸우고 책을 보거나 바다를 보고 배 안을 막 돌아다녀보고 다시 또 돌아다녀보고 자판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여기는 일본 맥주를 파네 중얼거리고 그럴 때 나미는 탕에 몸을 담근 채 얼굴만 물 밖으로 내밀고 아무도 안 지나가네 지나가도 내가 보이지는 않겠지 생각했다.

 

p. 87

나는 잘 갈 수 있어.

잘 갈 수 있어?

잘 갈 수 있다.

그래 잘 올 수 있다. 잘 와.

나는 내가 혼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혼자 서 있을 때가 있지만.

 

p. 89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몸으로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따.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한솔은 열여섯 열일곱에 읽던 책들을 지나가며 아 이미 헤어졌군 우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게 된 사람들도 가끔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 90

버스는 자기 좋을 대로 삼십 분 넘게 달렸다.

 

p. 92

친구들이여. 이것이 전부다. 난 모든 걸 해보았고, 모든 걸 경험했다. 기운이 있다면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이제 당신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아르투로 벨라노 .

 

p. 94

한솔은 숨을 거두고 아이들과 강아지의 나라로 갔다. 혹은 죽지 않은 한솔이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아침에 커피와 빵을 먹고 일을 하고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그때는 말투도 자연스럽게 부산 사람과 비슷해져 있었다. 옷은 적고 신발도 두 켤레고 이 좁은 방에 빽빽하지 않을 정도로 채워진 한솔의 짐들, 한솔은 어떤 것이 있을지 하나씩 불러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 97

당분간 자신을 마치 이리저리 움직이는 좌표처럼 생각해야겠다고 결정했다.

 

p. 98

시간은 길고 시간은 많고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거야. 그래도 그냥 살면 된다는 이야기를 유미는 했다. (...) 어째서 자신을 지우고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거기서 또 눈에 띄고 싶은지. 자신을 몰아세움으로써 얻게 되는 가치에 몰두하게 되는지. 괴롭다는 인식은 어째서 늦게 찾아오는지. 나미는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작게 들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일 년은, 어쩌면 이 년은 연필로 글씨를 연습하고 손톱깎기로 손톱을 깎는 일을 열심히 하고 걸레를 꽉 짜는 일 같은 것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신 유미는 마치 나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이 시간은 길다고 했다.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 시간은 길어.

-시간은 길어. 화장도 하고 음악도 들으러 다니고. 그냥 나가봐라. (산책처럼)

 

p. 103

나미는 먼저 질문은 하지만 실제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머뭇거리거나 아니요 말할 수 없어요 라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문제에 대해 부드럽게 포장하지 않고 말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 사람은 다 커도 그렇게 영향을 받고 잊어버리고 변하고 그러는 거예요.

'자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정의 변  (0) 2020.03.04
quotes  (0) 2020.01.31
뭍으로 나가면 제일 먼저  (0) 2020.01.30
김세희, 항구의 사랑  (0) 2019.12.28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0) 2019.04.13
Posted by 그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