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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9.14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 정혜윤 2
  2. 2022.02.10 아무튼, 메모 (정혜윤)
  3. 2020.09.26 quotes

 

-무사는 내 전 연인의 이름이다. 나를 만나기 전의 무사는 내 친구의 연인이었다. 내가 알기로 무사는 늘 누군가의 연인이었다. 그녀는 연인들을 떠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어."

나도 그 영원한 진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 그 말을 한 사람은 나였다.

 

 

-"라슬로 수상 소감이 진짜 인상적이더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으로 무사가 말했다. 무사는 뭔가에 푹 빠질 때 아련하게 눈이 빛났다. 그럴 때 무사의 눈은, 잊고 있었지만 그리운 것을 담고 있는 거울 같았다. 나는 무사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뭐라고 했는데?"

"아마도 나는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인 것 같다."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면? 그 작가의 책은 읽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존경할 것이다.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연인이라면?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연인이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칠 것이다. 그 일을 영원히 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헤어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랑은 이 세상의 많은 일들에 반대하게 만들어. 반대하는 힘이 한 사람의 진짜 힘이야.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반대자가 될 거야. 사랑해.'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무사가 나에게 준 크리스마스카드에 적힌 문구였다. 내가 그 문구를 읽고 있을 때 무사는 내 어깨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웃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무사의 발목에 오래 키스했다. (발목은 무사의 몸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무사에게는 어려서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담 밖을 내다보던, 세상을 궁금해하던 소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운 날에, 진짜로 카드 속 문장을 살아내려면 삶을 완전히 바꿔야만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기러기들아. 고니들아. 너희들이 제아무리 위기에 처해도 나에게 애원하지 마. 아무것도.

 

-내 사랑을 거부한 무사에게는 더한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힘을 빼앗고 싶었다. 내면의 불, 거의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는, 그 빛을 꺼버리고 싶었다.

 

-그때 '사랑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 진짜 피곤하다"라고 말했다. '사랑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찾아봐"라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고독이야. 다른 사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고독. 왜 다 똑같은 거야? 그런 고기는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왜 없는 거야?"

'사랑해'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넌 정신병자야. 강박증 환자라고!"라고 말했다. 영화 <노트북>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말했다.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될게." 내 친구들은 그녀를 또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사는 또라이가 아니었다. 무사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무사에게 맞는 적절하고 정확한 단어-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답답한 일이었다. "진짜 이름이 힘이래!"라고 무사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친구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자유로웠다. 그런데 고통스러웠다.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사를 잡았어야 했나, 두 팔로 눈을 가린 채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고전적인 질문으로 들어갔다. '사랑을 원하나, 자유를 원하나?'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한번 시간 속에 흩어진 존재가 되어갔다.

 

-무사는 다른 사람과 절대로 헷갈릴 수가 없었다. 즉, 무사는 이 세상과 맞지 않았다. 다만 너무 아름다운 방식으로 맞지 않았다.

 

-무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자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무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무사!무사!"

얼마나 소리 질렀을까? 무사가 나타났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는 달려가 무사를 안았다. 한참을 꼭 안고 가만히 서 있었다. 서서히 슬픔이 장미 향으로 채워졌다. 서서히 슬픔이 사랑으로 바뀌었다.

 

-내가 무사 곁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사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마침내 무사와 내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 방식을 찾았다는 것을.

"너는 책을 읽어. 나는 장미를 가꿀게."

 

-"너무 궁금해. 보티첼리가 한 말은 뭐였어?"

"알고 싶어?"

"응."

"아,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서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필리피노, 언젠가 나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추방당한 왕후>에서 나를 건드린 건 바로 이 문장이었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이것이 내가 인생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임을, 내 전 재산을 바꿔서라도 얻고 싶은 단 하나의 것임을 이 문장으로 알았다.

그림의 제목은 <추방당한 왕후>.

필리피노는 그림 밑에 한 구절을 써놓았다.

'어두움이 깊다면 거기서 잉태된 아름다움또한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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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울 :

아무튼, 메모 (정혜윤)

2022. 2. 10. 20:24 from 자개

27p.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타인은 많아도 내게 중요한 타인이 없다면? 기억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서 메모의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다면, 그날은 새처럼 날아가 버린다. 

 

32p.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 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로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 어디선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거기 가서 그 일을 잘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이 필요한데 세상이 과연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세상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데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나에겐 사랑이 필요한데 누가 나를 사랑해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때 당시 나는 더는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무의미하게 살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믿었다. 

 

34p. 나는 처음으로 '메모의 화신'이 되었다. 나 자신을 위한 메모를 했다. 문구점에 가서 가장 두꺼운 노트를 몇 권 샀다. 거기에 책을 읽고 좋은 문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에게 도움이 될 생각들을 꿀벌이 꿀을 모으듯 모았다. 

그때 나는 노력하면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믿어야 했다. 믿기 위해서라도 나 스스로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각주) 나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순간을 반드시 맞는다. 삶을 사랑한다는 말, 다시 시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믿음이다. 그 뒤로도 무슨 일을 겪든 다시 시작할 마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36p.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36. 모든 노트의 맨 앞부분에는 항상 상당히 조악한 그림을 그려넣었다. 이동 중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한 빼빼 마른 인간 (졸라맨처럼 생겼다)이 한 발은 땅에 딛고, 다른 한 발은 땅에서 뗀 그림이었다.* 내가 발을 땅에 딛게 하는 힘, 그 땅에서 발을 떼게 하는 힘, 둘 다 바로 메모였다.

 

*막 스타트를 하려는 백 미터 달리기 선수들의 사진을 붙여놓은 적도 있다. 다 무명의 선수들이다. 

 

42. 내일은 더 나아진다. 조금씩 바꾸면.*

 

*그래서 이런 말을 듣고 싶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새로워지니. 몰라보겠다." 

 

43. '운명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운명에 맞서다'라는 말도 있다. 나에게도 운명에 맞설 마법의 주문, 마법의 단어가 필요했다. 사실 우리의 운명은 늘 변화 중이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인생이 내 영혼의 어떤 반응일 가능성은 적지 않다. 

 

45. 한때는 사회가 나를 제 맘대로 소유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가 그 일을 하고 만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내 생각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만다. 결국은 대다수의 시선에 의존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어쨌든 사회 속에서의 삶이 수동적일수록 능동적인 부분을 늘릴 필요가 있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이 사회와는 조금 다른 시간 ㅡ 고정관념, 효율성,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적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47.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 활주로가 필요하듯 우리도 날아오르려면 토대가 필요하다. 그 토대는 자신이 택한 삶의 새로운 원칙과 새로운 '시선'으로 가득 찰수록 좋다. 이 원칙과 시선으로 가득한 메모는 우리에게 딛고 날아오를 토대가 되어준다. 

 

49. 쉼보르스카 시인이 쓴 대로, "영리하고 재치 있는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한 것, 새로운 임무에 언제라도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필요하다면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것"은 오로지 증오 뿐이다. 하지만 증오는 조만간 우리의 생기를 빼앗을 것이다. (...) 마음이 증오나 원한으로 꽉 차는 날이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꽉 찬 마음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재빨리 펼쳐 볼 수 있는 것이 손에 잡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다. 

나의 경우엔 이런 날 꼭 보던 메모가 있다. "꽃이 폈다. 바깥에 좋은 것 많다. 나가 놀아라. 네 생각 바깥으로 나가 놀아라." 

그리고 또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말이다. "저년 머릴 잘라버려. 1분에 한 번씩."

 

61. 오늘의 헛수고 :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을 닮으려고 너무 노력했다.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너무 노력했다. 오늘도 나는 나의 그림자로 살았다. (쉼보르스카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다들 자신의 그림자로 살기로 했는데 그림자는 아무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려고 애쓰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은 것도 없다.) 

 

63. 메모도 책 읽기나 글쓰기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진지한 즐거움, 놀이의 영토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를 스스로 결정하는데 왜 즐겁지 않겠는가? 

 

67.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82. 그 그림에서 끝장내버린 것은 고독이다. 인간의 고독은 끝났다. 동물의 고독도 끝났다. 

 

"어머, 너 여기 있었구나!"

"이게 네 뺨이니?"

"이게 네 날개? 이게 내 부리? 이게 네 뱃살? 이게 네 줄무늬? 네 털?"

서로에 대한 반가운 확인은 열두 달 내내 계속된다. 

"이게 너의 걸음걸이? 오늘이 네가 존중받는 날?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어디 안 갔다고? 내가 그동안 못 본 거라고? 좋아. 이제 고생은 끝났어! 우리 함께 있잖아. 우리 몸이 함께 있잖아. 이제 알았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서로의 몸이야! 고통스러운 몸도 서로 안고 있으니 좋다."

"인간아, 나도 네가 필요해!"

"그 말 정말이야? 나는 누가 나에게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들어본 지 정말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에게 이렇게 말해. 우리는 끝이야! 네가 필요 없어!"

"서러워라! 이젠 걱정 마. 내가 있잖아."

 

 

83.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올랐다.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할 뿐."

 

94. 아무리 둘러봐도 꿈의 도착지가 다른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고통이었다. 꿈은 다른데 꿈의 종착역은 같다. 거창하게 꿈을 이뤘다는 사람들의 결론도 '돈'이었다. 돈 혹은 건물 혹은 셀럽. '나는 너를 살리고 싶어'가 아니고... 

 

94. 홋카이도로 불곰 투어를 간 일이 있다. 그 투어는 내 인생 최고로 전복적인 여행이었다. 그 투어는 불곰을 보는 투어가 아니라 불곰을 보면 절대 안 되는 투어였다. 불곰을 보는 여행이 아니라 불곰을 보면 안 되는 여행이어서 이 여행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불곰을 보면 여행자들은 즉시 여행을 멈추고 뒤로, 뒤로, 뒤로 ... 출발지로 돌아와야 한다. 대신 여행자들은 불곰의 대변, 불곰이 부러뜨린 나무, 불곰이 오른 나무, 불곰의 모든 흔적을 보고 불곰이 살아있음을 뛸 듯이 기뻐하면 된다. 그곳은 불곰의 집이니까. 

 

 

96.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 떠오른다. "해답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즐겨라." 나는 지칠 때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 어디선가 고래가 숨 쉬고 있다! 지금 고래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래처럼 깊게 숨을 쉰다. 

 

109. 친구는 음악에 일생을 걸었다. 일생을 건다고? 현대적 삶에는 어쩐지 구식으로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렇지만 친구는 환상 없이 꿈꾼 대로 살기를 택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며 산다. 그는 꿈 때문에 많은 슬픔을 겪었고 현재도 겪어내고 있다. 꿈 때문에 참으로 외롭게 세상을 걸어왔다. 

그 친구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꿈을 갖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로 하여금 묻고 또 묻게 만들었다. 소득의 불안정은 꾸준히 사람을 위축시킨다. 꿈은 근심 걱정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는 품위 있는 가난뱅이다. 그 친구는 타인의 돈이 아니라 자기처럼 지친 사람들의 슬픔에 관심을 가질 줄 알고 그 슬픔에 마음을 활짝 연다. 그가 자신의 쓰라림을 어떻게 달래는지는 나에겐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 친구가 옛날 옛적에 가장 아끼는 기타를 실수로 잃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 기타 소리에 가장 근접한 기타를 마련하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 기타에 짧은 문구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기뻤지만 거절했다. 

"이 소중한 악기에 내가 어떻게... 나는 못해."

"기타 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아주 좋은 말 한마디만 부탁해. 정말 좋은 기운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

"아냐, 아냐. 나는 못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기타를 유심히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뭐가 그렇게 유별나게 좋은 기타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속으로 친구에게 물었다. '기타가 그렇게 좋아?'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안다. 그렇게 좋다고 할 것이다. 착잡했다. 

우리 사회는 꿈을 너무 오래 말하는 사람을 억압한다. 너무 오래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을수록 철부지 사춘기 미성숙한 소년쯤으로 여긴다. 솔직히 내 눈에도 기타를 보고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이 딱 철부지처럼 보인다. 나는 친구와 기타를 번갈아 보았다. 내 친구의 여위고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활짝 웃고 있었다. 배고파 쓰러져도 음악 소리가 나면 웃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친구에게는 가난도 건드리지 못하는 단호함과 인내심이 있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만큼 멀리 자기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는 고통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 

친구는 퀸의 <Radio GaGa>에 나오는 가사 한 부분을 아주 좋아했다. "Someone still loves you." 

 

(...) 나는 몇 분간 고심하다가 펜을 들었다. (...) '지금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 

 

118. 어쨌든 몸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란 최종적으로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전투 같았어요. 내뺄 수도 없으니 전투를 명예롭게 치르는 것 외에 무슨 다른 선택이 있을까 싶었어요. 

 

124. 카프카의 말대로 "나는 나 자신에게는 너무 무겁고 타인에게는 너무 가볍습니다."

 

129. 나는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저녁의 커다란 손길이었다. 노을을 사랑하듯 삶을 사랑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130. "진짜 너 알아보나 봐." 

친구는 내게 옆에서 떠들든 말든 계속 "꼽추야, 꼽추야" 하고 불렀다. 어쩐지 둘만 놔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뒤로 물러나 둘을 지켜보았다. 내 친구는 곧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으니 어쩌면 그때 친구는 꼽추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을 수 있다. 나는 내가 보는 것들, 그 모습 그대로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맹금류관의 독수리 그리고 장애가 아닌 또 다른 콘도르들을 봤고 하늘을 봤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니까.' 커다란 나무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세상엔 슬픔이 많아.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라니까.' 나는 그 충고를 일생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이 잊고 살았다. 

 

157. 왜 인간을 아무렇게나 대하느냐고 무려 75년 동안이나 물었다.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이 만연한 사회에서 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느냐는 질문은 너무 본질적이라서 급진적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왜 차별하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나 근본적이라서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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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울 :

quotes

2020. 9. 26. 19:08 from 자개

/ 벗이여, 캄캄한 밤에 등불을 켜면 그 방 속에 쌓여 있던 백 년 동안의 어둠은 일시에 사라진다. 이처럼 벗이여, 그대 마음에 진리의 불을 켜라. 거기 까마득한 날에 쌓였던 영혼의 어둠은 모두 사라지리라. -화엄경 

 

/ 그때부터 돈은 내게 노동의 목적이 아닌 학생과의 관계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어떤 매개물로 변모하는 것이다. 

 

/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는 경험은 대체로 중첩을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맥락을 즐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여러 말소리를 듣는 경험은 무언가가 방해받거나 교란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나는 이렇게 차분한 어투로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한 자리에서 한 사람만 말하는 것이 대화의 암묵적 원칙이었다. 아주 침착한 어투로 '대화'가 지켜오던 선을 순순히 넘어가는 기분이 엄청나다고 생각다너 중, 스코어 매뉴얼 끝부분에 있던 질문들이 마침내 체감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읽는 것과 외와서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페달 밟을 때 거의 일어날 것 같지 

 

/ 그리고 거기 평화에 싸여 누워있을 때의 무한한 쾌적함. -버지니아 울프 

 

/ 솔직히 나는 타인의 손으로 구원받고 싶다. 사람들은 그게 나쁘다고 한다. 구원은 셀프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다들 그렇게 강하신가요? 아니잖아요. 

 

/ 외로움을 감추고 부인하며, 강한 척, 괜찮은 척 하는 것은 극복하는 방법에서 나를 점점 멀어지게 할 뿐. 소리를 내어 속시원히 내뱉어 보자. "나는 외롭다" 외로움을 인정한 순간 내 초점은 더이상 문제가 아닌 그 해결방안으로 옮겨가게 된다. 

 

/ 우리는 또한 그 결정으로 인해 통제력을 잃을까봐 두려워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즉 선택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일의 결과를 통제하는 것을 멈추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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