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ure nacre :: 탈식민

탈식민

2020. 3. 8. 19:10 from 자개

‘광주역’과 ‘동대구역’

 

우선, 이 글에서 ‘서울’, ‘광주’, ‘동대구’, ‘부산’ 등의 용어는 일종의 비유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지방 강의를 가는 일이 많은데 주로 KTX를 이용한다. 전국(?)을 다니다 보면 모든 면에서 내가 사는 지역(서울 지방)과 다른 지방 그리고 지방과 지방이 저절로 비교된다. 인심, 음식, 경제, 경관 등을 비교할 만큼 오래 체류하지는 못하지만, 교통 상황만큼은 확실하게 체험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에서 교통 문제는 결국 서울과의 거리, 서울에의 접근성 문제이지 수치상의 거리는 별 의미가 없다. 서울을 거쳐 가는 것이 거리상으로는 멀어도 편리한 경우가 허다하다. 세계화가 곧 미국화를 의미하고 국제사회가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나는 철도회원(코레일 회원)인데, 처음 가입할 때 일정 금액을 내면 포인트가 적립되며 그 포인트로 기차표 구입이 가능하고 할인도 되는 일종의 ‘우대’ 카드를 받는다. KTX가 정차하는 광역자치단체 정도의 도시에는 역마다 코레일 회원만 입장 가능한 코레일 라운지가 있다. 커피, 인터넷, 휴대전화 충전기 등이 무료이고 티브이를 보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지방 강의의 동선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코레일 라운지에서 이메일 처리, 물 마시기, 수면 등의 업무(?)를 주로 처리한다. 내 입장에서는 유용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광주역과 광주송정리역 두 곳 모두, 이 코레일 라운지가 없다. 또한 광주역은 동대구역과 부산역 규모의 5분의 1정도 크기로, 내가 사는 집 근처의 서울 지하철역보다 규모가 작다. 당연히 편의 시설, 카페, 상점 등을 기대하기 어렵다. 동대구역에 빵집이 10개 있다면, 광주 송정리역에는 도넛 가게 한 개인 식이다. 서울에서 동대구까지 빠르면 1시간 40분, 늦어도 두 시간이 안 걸린다. 광주는 KTX가 의미가 없다. KTX를 타도 예전과 비슷하게 3시간 넘게 걸리지만 요금만 비싸졌다. 불평등은 끝이 없다. 서울에서 동대구, 부산의 배차 간격은 10분, 15분 정도이다. 웬만한 서울 지하철보다도 짧은 간격이다. 그러나 서울-광주 노선은 1시간 30분 간격으로 배정되어 있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도 그렇지만, 특히 배차 간격은 광주행 강의를 기피(?)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동대구나 부산은 거의 실시간으로 강의 시간을 맞출 수 있는 반면, 광주는 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하기 - 차별, ‘피해’에서 새로운 저항의 근거로

 

얼마 전 나는 광주의 한 강의에서 ‘중립적인 서울 사람으로서’ 이러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하니, 마치 나만 당했다는 듯 “여러분은 분하지 않느냐”의 요지로 열변을 토했던 것 같다. 집에 오니 당시 수강생이었다는 나정수 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분의 허락을 받아 여기 그대로 옮긴다.

 

 “…… KTX 문제와 관련하여 저도 서울에 자주 다녀야 하는 입장이라 매우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KTX와 연관되어 있는 서울 중심성을 생각할 때 어쩌면 지금 우리(광주)가 가지지 못한 KTX가 오히려 지방 경제와 의식을 더욱 지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구는 KTX가 생기면서 병원이나 상점, 서비스업 등이 모두 서울에 밀려 경쟁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아플 때도, 놀 때도, 쇼핑할 때도, 공부할 때도 모두 서울로 올라가 버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구 시민은 서울의 풍요한 문화와 경제를 누리는 것 같지만 실상 대구의 경제와 문화는 낙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비대한 서울이 블랙홀이 되어 한국 사회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데 KTX가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KTX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광주나 전라도는 서울에 가고는 싶지만 서울 가기가 힘들어서 아직은 지방의 병원, 상점 등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미국이 쿠바에 모든 비료, 원조를 끊었을 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쿠바가 유기농법을 택하고 성공한 것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KTX를 제발 좀 늘려 달라고, 즉 서울 좀 빨리 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저항이 아니라 우리는 안 가도 된다고, 서울에 안 가는 대신 우리도 서울과 같은 문화를 가지겠다고 할 때 진정한 서울 중심성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패배적인 지역사회의 자기 합리화인지 아니면 정말 이것이 진정한 열쇠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편지는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그 어떤 탈식민 이론서보다도 탈식민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었고, 깨달음과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이 편지를 쓴 분(젊은 여성)은 위에 인용된 내용 외에,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내가 덧붙일 말은 하나도 없었다. 완벽한 글이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서울과 광주 사이의 KTX 문제를 ‘차별’이라고 보는 것은 누구의 입장인가? 나의 경험은 서울에 살면서 아주 가끔 광주에 볼일이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 불편일 뿐, 이를 차별이라고 보편화할 근거는 없다. (물론, ‘차별’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나는 서울 사람의 시각에서, 서울이 좋다는 전제에서, 서울이 중심인 것은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에서, 광주의 상황을 재단하고 그것을 ‘광주편’이라고까지 떠들어 댄 것이다. “내가 중심이고 중심에서 멀어진 너는 차별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 서울 중심주의! 서울과 비서울 지역 사이의 교통 ‘불편’이, 비서울 지역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이 오만!

 

 

다른 목소리의 가능성

 

차별을 옹호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나는 모든 불평등에 분노한다.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과 피해, 고통, 억압은 저항의 대상이며 교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별개의 논의이다.
 다만, 이 글에서 문제 제기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차별의 기준이나 개념 자체가 차별을 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차별을 시정하는 것만큼이나 차별 현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작업의 ‘해방적’ 의미에 대해서이다. 차별unequality을 불평등이 아니라 ‘다름difference’으로 재개념화하는 것은, 차별의 기준과 내용을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나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하지만 이런 투쟁은 대개 실패하기 쉽다. 상대방이 수용할 리 만무하며 게다가 소위 “적을 닮아 가기” 쉽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세계 공용어가 영어라서 미국 사람들은 행복할까? 요즘 미국인에 대한 정의는 ‘1개 국어’를 쓰는 사람이다. 미국의 문맹률이 전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이 살벌한 글로벌 경제에서 1개 국어만 해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미국인밖에 없다. 그런데 왜 세상은 1개 국어밖에 못하는 사람들은 우월하고, 2개 국어 이상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가? ‘온 국민이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도 차별이지만, 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지, 왜 영어가 모든 담론의 기원이라는 통념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사고방식이 더 심각한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노동자는 대개 모국어와 한국어를 둘다 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보통 한국인보다 언어 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우월하다거나 ‘지식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어는 구경도 못 해본 대개의 미국인이 영어 잘하는 한국인을 대하듯 말이다.

 탈식민脫植民, 해방이란 ‘지배 세력’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정의하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의 시선으로 나를 정체화하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상대화하는 것, 서울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 서울을 인식의 참고 문헌에서 제외하는 것, 서울을 ‘왕따’시키는 것, 서울과의 거리로 자기 지위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사실 중의 하나는 ‘평등’이 대개는 흡수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이든 ‘미국’이든 ‘남성’이든 우리가 흔히 ‘중심’이라고 불리는 경계선border, 그 집단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집단 내부는 결코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 다 같은가? 미국 내부의 차별이 얼마나 많은가? 남성들 내부의 차이는 남녀 간 차이보다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한다면, ‘중심’과의 같아짐을 의미하는 평등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 이전에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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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