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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항구의 사랑

2019. 12. 28. 13:08 from 자개

 

-나는 인희를 통해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마음 편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걸 배웠다. 

 

-인희와 내가 다시 만나기까지 그사이 목포시의 여학생들 사이에 일어났던 변화를 어떻게 그려 볼 수 있을까? 처음에 그건 말하자면 피어싱 같았다. 뺨과 귀 사이에 있는 조약돌 모양의 연골을 뚫는 피어싱처럼 처음엔 충격적이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독특하고 예뻐 보였다. 

토요일 오후에 은혜가 중앙고등학교 교복 입은 언니랑 손을 잡고 가는 걸 4반 지연이가 봤대. 진짜? 은혜도? 걔 원래 안 그랬잖아? 무슨 우리 학교 절반이 이반이냐? 은혜, 이반 싫어했는데. 피어싱이 퍼져 나가는 무리에서 후발 주자가 다소 멋쩍게 머리를 넘기며 사실 자신도 일요일에 시내 액세서리 가게에서 연골을 뚫었다고 털어놓듯이 옆 반 아이와 오늘로 일주일째라고 털어놓는 친구의 얼굴에도 그런 종류의 수줍음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학교마다 셀레브리티 커플이 있었다.

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는 진영과 수미라는 유명한 커플이 있었다. 하교할 때 교문 근방에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진영과 수미를 실제로 보고 싶어 먼발치에서나마 보려고 찾아온 애들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생 언니들이 온 적도 있었다. 

진영과 수미는 늘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학생들은 일일 연속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두고 그러듯 둘에 관해 이야기했다. 둘 사이의 질투와 다툼에 대해, 애정 전선의 미묘한 기류에 대해. 수미가 진영에게 헤어지자고 했대. 너무 힘들다고. 너를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진영이가 어쩐 줄 알아? 아, 세상에. 그 이야기를 들려준 아이는 수미의 친한 친구 ㅡ 아이들은 그 애를 수미의 시녀라고 불렀다 ㅡ 이혜정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전율에 휩싸여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진영이가 수미 어깨를 양손으로 딱 잡고 이랬다. 너,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얘들아, 수미 안 다치게, 수미 다친다. 수미 다쳐. 

 

-우리 반에도 커플이 있었다. 학기 초부터 사귀었는데 2학년에 올라갈 때까지도 사이가 변함없었다. 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도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눈짓을 해 둘이 밖으로 나간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었다. 둘만 있을 때는 한쪽이 다른 쪽을 '아가'라고 부른다고 했다. 한쪽이 씀씀이가 헤펐기 때문에 아가가 두 사람의 용돈을 맡아서 관리했다. 우르르 매점에 가서 도넛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때면 아가가 지퍼 달린 자그마한 지갑에서 두 번 접힌 천 원권을 꺼내 두 사람분의 돈을 치렀다. 

가끔 그 애들이 부러웠다. 그건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끔 신자들을 부러워하는 심리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1초도 빠짐없이 나를 주시하고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는 신이 있으면 사는 일이 한결 든든하지 않을까.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이. 그걸 믿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는 눈동자 같은 신의 존재를 느끼며 힘을 내어 하루하루 살아갈 테니 말이다. 

 

-토끼야, 나와서 상 좀 가져가거라.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ㅡ 당연히 ㅡ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

<항구의 사랑>은 사랑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최은영의 소설이 떠오른다. 뭉근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하고 진한 사랑들. 나는 청소년 때 아이돌과 팬픽에 빠졌었지만, 이반은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도 이반이 있었지만 내가 이반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의 다양한 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퀴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게 되었고, 퀴어의 사랑을 경험한 뒤로 그 전으로는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고 싶어졌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무궁무진했다. 나는 100살 넘게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작은 (큰) 꿈을 꾸게 되었다. 

 

자신이 사랑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소설이 마음에 들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었다. 

 

 

Posted by 그울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2019. 4. 13. 22:54 from 자개

99.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집에서 자라고 했는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다시 이러면 진짜 혼낸다." 다그치다가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볼을 비비대던 엄마,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149. 나는 수업을 들을 때나 학관 로비에서 혼자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 지하철에서 앉을 자리가 날 때면 노트를 꺼내 공무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쓴 편지들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다. 점심으로는 무얼 먹었고, 저녁에는 무얼 먹었고,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을 봤고, 어떤 공부를 했고, 학원에서는 시험지를 몇 장 채점했고 하는 아무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공무가 웃을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메모해놓았다가 편지에 썼다. 너 그거 정말이야? 웃겼어, 라는 답장이 오면 그보다 큰 보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긴 글을 수시로 썼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편지들이 그 시절의 나를 구해줬던 것 같다. 데이트도 없고, 변변한 학교 친구도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예쁜 샌들 하나 사지 못하고, 자주 체하고, 과외는 잘리고, 일하는 학원의 동료들과는 겉돌면서도 괜찮았다. 세상 누군가는 나의 이런 변변찮은 일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3학년 봄이 갔다.

 

162. 내가 매일 조금씩 달라졌듯이, 모래 또한 내가 처음 만났던 모래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4. "그래요, 선생님. 전 돈이 좋아요. 돈이 좋아서 여기 왔어요." 

"내 방에서 나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왔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으면서도 결국 기대하게 된 나를 탓했다.

 

166.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는 모래를 나는 안았다. 모래의 몸은 감기 걸린 사람처럼 뜨거웠다. 얇은 니트 아래로 어깨와 등의 가느다란 뼈가 만져졌다. 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충분히 벗어날 있는 상황에 다시 들어가놓고 나와 공무 앞에서 외롭다고 징징대다니. 모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 

 

179.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

 

229. 숙모,

여자는 고개를 들어 혜인을 바라봤다.

숙모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게 될 줄은 몰랐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엷게 웃었는데, 혜인은 그 말이 여자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 넌 내가 불쌍해 보이냐,

여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어때 보이는데.

짧은 반고수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작은 눈, 볼 위의 주근깨, 입가의 파인 흉터, 기다란 목, 큰 손과 발, 말린 생강 냄새, 따뜻한 체온, 두꺼운 양말, 혜인을 바라볼 때의 장난스러운 표정 같은 것들.

숙모는 숙모지.

혜인은 그렇게 말하고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내 숙모지. 

여자의 곁에 붙어 앉은 혜인의 머리를 여자는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너는 혜인이지, 혜인이 너는 너지.

 

243. 대도시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누나는 언제까지 엄마에게 얹혀살 거냐고 타박했지만, 내 삶까지 신경쓰기에는 누나는 너무 바빴다.

 

251. 말수가 적은 중년 커플과의 저녁 시간마저도 기다리게 되는 정도의 외로움에 빠져 있노라면 한 달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므로. 내게는 시간을 흘려보낼 구멍 같은 것이 필요했다. 

 

268. 엉뚱하고 철딱서니 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모두를 웃게 하는 막내 랄도. 그런 역을 맡으려고 노력했던 내 모습이. 나는 모두를 실망시켰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누군가가 내 배를 걷어찬 것처럼 아팠다.

 

274.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Posted by 그울 :
 


고요하게 어둠이 찾아오는 이 가을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꾸네
만리 넘어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어도 나는 꽃밭을 일구네

가을은 저물고 겨울은 찾아들지만 나는 봄볕을 잊지 않으리

눈발은 몰아치고 세상을 삼킬듯이 미약한 햇빛조차 날 버려도 

저멀리 봄이 사는 곳, 오, 사랑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날으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돛대가 없어도 나는 바다를 가르네

꽃잎은 말라가고 힘찬 나무들조차 

하얗게 앙상하게 변해도

들어줘 이렇게 끈질기게 선명하게 그대 부르는 이 목소리 따라

어디선가 숨쉬고 있을 나를 찾아

네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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