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 "이민자들"조차 오늘날에는 현실적 위험으로서 두려움을 느껴야 할 그런 강한 의미의 이방인, 또는 면역학적 타자라고 할 수 없다. 이민자나 난민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
우리는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인다.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고대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ㅠㅠ)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요즘의 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장구를 배우는 요즘의 나)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두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는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생동성이란 본래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지만, 그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으로 환원되고 만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긴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진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자아가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었다. 이 세상에."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김민정 시인도 같은 맥락에서 시집 제목을 지었더랬다.)
/칸트에게서 초자아의 위치를 점하는 것은 양심이다. 칸트의 도덕적 주체 역시 폭력에 예속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갖고 있으며 내면의 판사에게 감시당하고 위협받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처럼 법을 넘어서 인간 내면에서 감시하는 폭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본질에 합체되어 있다." 칸트의 주체 역시 ㅍ로이트적 주체와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분열된다. "양심이라고 불리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원천적 성질은 그 자체로 특별한 점을 지닌다. 즉 이러한 양심의 일이란 인간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일이지만, 인간은 이성적 판단으로 그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명에 따라 행하도록 강제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 분열 때문에 칸트는 양심을 지닌 주체를 '이중 자아' 또는 '이원적 인간'으로 규정한다. 도덕적 주체는 피고인 동시에 재판관이기도 한 것이다.
(...) 도덕적 신은 고통 속에서 해낸 일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을 선사한다. "아주 정확한 비례에 따라 윤리성만큼의 행복이 배분된다." 윤리적이고자 고통을 감내하는 도덕적 주체는 보상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진다.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나는 행복하면서 불행하다.) 보상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신뢰할 만하다.
/오늘의 생산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 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버렸다.
/나르시스트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마주치는 모든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 하는 것이다. (작년 봄의 내가 꼭 그랬다. 나는 길을 건널 때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건너보았고, 뒷산을 산책하면서도 타인에게 말을 거는 내 자신이 보고싶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돌아온 방 안에서 충분히 외로웠다. 충분히 행복했고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 때 나는 아름다웠으므로 많은 이들에게 쉽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었고 다만 그들에게 사랑받는 내 자신만을 사랑할 뿐이었다. 나는 그들과 섞일 수 없었고 그들 또한 나와 섞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의 피로는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런 나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되었다. )
(...)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비해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20살 이후의 나는 대체로 그러했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
(...)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이 주체를 자기 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상, 확고한 성격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 완결에 이르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잃고 열려 있는 공간 속에 흩어져버린다. 완결된 형식의 부재는 무엇보다 경제적 조건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개방성과 미완결성은 성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 없이, 다시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실체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즉 이라고 말하면 움칫한다. 이미 말했는데 나는 뒤에서 설명할 걸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즉 이라고 좀 티내면서 설명해도 어쨌든 설명한다는 것이 어디냐. 귀여운 친절이다. ) (하지만 신형철의 다정한 친절이 더 좋음)
/정치에서나 사적인 삶에서나 갈등은 민주적 문화의 규범적 핵을 이룬다. 그러나 우울증은 갈등에서 어떤 관계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사태에 대한 표지이다. 이제 갈등은 더 이상 개인의 통일성을 수립하지 못한다.
갈등 모델은 고전적 정신분석학에서 지배적 의미를 지닌다.정신분석학적 치료의 핵심은 심리적인 내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즉 그러한 갈등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그런데 갈등의 모델은 심적 억압과 부인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따라서 부정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우울증에 갈등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탈이념화라는 맥락에서 (...) 사회적, 정치적 사건은 더 이상 이념들 사이의 분쟁이나 계급 간 분쟁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이제 거의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긍정화가 폭력을 철폐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분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도 폭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긍정해 -> 네가 뭔데 내 정체성을 긍정하고 부정해?)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의 전일적 지배는 현재로서는 합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투쟁이 집단, 이데올로기, 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에랭베르의 생각과는 달리 성과주체의 위기에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을 끝날 뿐이다.
/복종적 주체가 초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주체는 자신을 이상 자아에게 기투한다. 예속과 기투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안도 다다오를 존경하는 것과 안도 다다오가 되고 싶은 것은 별개여야 한다. 나? 건알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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